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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매일신문] "혁신·파괴·도전… IMF도, 금융위기도, 대기업도 맥 못추더라" (2017.03.21)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시 : 2017-03-23 17:57
  • 조회 : 1,340



매일신문 3월 21일자 21면 기사


 
 

 "혁신·파괴·도전… IMF도, 금융위기도, 대기업도 맥 못추더라"




자전거 행상에서 출발해 국내 최대 공구 유통 업체를 일군 최영수 크레텍책임(주) 회장은 “어렵고 힘든 고비를 이기면 더 큰 기회가 온다”고 말한다. 박노익 대기자



크레텍책임㈜은 국내 산업공구 유통 분야의 1위 기업이다. 2위 업체와 매출에서 두 배 이상 앞서고, 2`3`4위 매출을 모두 합해도 크레텍책임㈜을 따라잡지 못한다. 현재 직원 숫자만 해도 600여 명에 이른다.
기존의 공구상들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공구 유통은 직원 30명 이상의 규모로 키울 수 없는 분야’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을 때, 최영수 크레텍책임㈜ 회장은 파괴와 혁신, 도전으로 대한민국 공구 유통업계의 역사를 창조해왔다. 그리고 지금도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고 있다.
대구 공구골목에서 자전거 공구 행상으로 출발해 국내 최고 기업으로 성장시킨 최영수 회장의 인생 이야기와 꿈을 들어본다. 고희(古稀)를 넘은 그는 아직도 꿈꾸고 있다.


◆실패와 좌절은 내 인생의 디딤돌

최영수 회장은 1947년 경북 고령에서 가난한 소규모 정미소집 2남 3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대구로 이사와 경상중학교를 졸업했다. 첫 번째 좌절은 10대 중반에 시작되었다. 가정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 없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눈물을 삼키며 기술자의 길을 걷기로 했다.
사회생활의 첫걸음은 조양철공소 견습공으로 시작했다. 이 당시 통상 3년 정도의 견습 기간을 마치면 기술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최 회장은 3년 뒤에도 끝내 기술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철공소 내부의 다툼과 불화에 휘말린 게 화근이었다.
“암담했습니다. 3년 동안 배운 기술을 하나도 인정받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철공소에 있으면서 온갖 공구를 접해 본 것이 유익한 경험이라면 경험이었습니다. 뭐라도 해서 밥이라도 먹어야 했으니까요.”
최 회장은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 앞 도로에 공구 노점상을 차렸다. 현재 크레텍책임㈜의 본사가 이 자리에 있다.
“제가 장사에는 타고난 소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구 노점상을 3개월 정도 하니까, 기술자보다 수입이 더 많아졌습니다. 자신감도 붙었습니다.” 그러나 순조로운 출발도 1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엿장수로부터 구입한 공구가 훔친 장물이었던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도둑으로 몰린 억울한 상황이었지만, 노점상을 처분해 보상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그야말로 빈털터리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가난한 집안에 어디 기댈 곳이라곤 전혀 없었다. 이번엔 공구 행상으로 나섰다. 배운 기술은 인정받지 못했고, 아는 것이라고는 ‘공구’밖에 없었다.
“참, 신기하죠. 공구 행상을 몇 개월 하고 나니 공구 노점상 때보다 오히려 수입이 더 많아졌습니다. 상황이 더 나빠졌는데 말이죠.”
공구 행상도 오래가진 못했다. 군입대 영장(통지서)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해군에서 군 복무를 끝내고 원양어선을 타려던 최 회장은 부모님의 강력한 만류를 물리치지 못하고, 다시 자전거를 끌고 공구 행상에 나섰다. 공구는 최 회장에게 ‘운명’이나 다름없었다.


◆엉뚱함, 창조와 혁신의 출발점

얼핏 보기엔 젊잖아 보이지만 최 회장은 사실 괴짜다. 1989년 PC 기반의 전산화를 도입하고 공구 카탈로그를 발행한 것은 ‘괴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대혁신이었다. 격년마다 발행되는 공구 카탈로그는 아직까지 어떤 경쟁자도 없다. 유료로 15만 부나 발행되며, 공구업계에서는 이를 ‘바이블’(성경)이나 ‘보감’(=한의학의 동의보감에 빗댄 표현)으로 여긴다. 올해부터는 아예 명칭도 ‘한국산업공구보감’으로 바꿨다. 이전에는 일본 것을 이용해야 했다. 공구 유통의 전산화 역시 선구적 도입에 그치지 않고, 시대 변화에 맞춘 지속적인 투자와 혁신으로 정보화 시대를 넘어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도 일류기업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고 있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대기업들이 막대한 자본력을 믿고 공구 유통 시장에 뛰어들었다가 끝내 두 손을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크레텍책임㈜이 전산화와 정보화 등을 통해 오랫동안 축적해온 방대한 자료(빅데이터)와 운영 노하우 때문이다.
“취급하는 공구의 종류만 12만7천여 종에 이르고, 개별 공구의 숫자는 헤아리기조차 어렵습니다. 거래 업체도 수천 개가 넘습니다. 단순히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분야기 아니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이…. 종합공구유통의 글로벌 경쟁력은 한국(크레텍책임)이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입니다.”
최 회장의 괴짜 기질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본격적인 장사를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1973년. 부모님들은 27살 된 아들에게 ‘장가가라’고 성화를 부렸다. 답답한 마음에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구혼광고를 신문에 내는 것이었다. 1973년 1월 8일과 9일에 걸쳐 매일신문 광고란에 실린 최 회장의 구혼카피는 ‘숯구이 검둥이 총각 바보온달의 아내 될 자는 없는가?’였다.
물론 이 광고를 통해 최 회장이 결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 회장의 이런 기질은 ‘엉뚱하고 별난 인재들’에 대한 이해와 포용력을 키워주었고, 크레텍책임㈜이 작은 회사일 때부터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들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군대에서 경영을 배우다

최 회장은 해군에서 3년간 복무했다. 기관병으로 해군 전투함을 타고 2년을 바다에서 보냈다. 이때도 공구와의 인연은 이어졌다. 사병임에도 불구하고 전투함에서 사용되는 모든 공구의 관리 책임은 최 회장이 맡았다. 기술 부사관들이 많았지만, 남다른 배움의 열정과 맡은 일을 최고로 해내는 성격 덕분에 레이더, 통신, 소나, 대포 등 모든 기계의 최고 기술자는 최 회장이었다.
그러나 ‘남다른 경영자’로서 눈을 뜨게 된 것은 레이더 기지가 있는 서해 한 외딴섬에서 근무한 1년 동안이었다. 해군 20명, 해병 20명, 육군 3명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한국함대 6전단 소속이었는데, 사령관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시한 사령관 복무 지침만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잘 먹어라, 잘 입어라, 잘 자거라, 잘 싸워라’입니다.”
사령관의 복무 지침은 말뿐이 아니라 그대로 실천되었다. 식비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진해에서 보급되던 부식을 현지 구매 방식으로 바꿔 식사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현지 어부들에게 생선을 구매하면 아주 싼 값에 살 수 있었다. 옷도 가장 좋은 것을 지급받았고, 침상도 2층 침대로 만들어 최고의 매트리스를 깔아 주었다. 그 대신 마지막 복무 지침 ‘잘 싸워라’를 실천하기 위해 엄청나게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그때 ‘내가 사회에 나가 회사 사장이 되면 이렇게 경영해야지’라고 다짐했습니다.” 최 회장은 다짐을 그대로 실천했다. 크레텍책임㈜이 임금과 복지 등에서 ‘대구의 작은 삼성’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배경이다. 최 회장은 “아무리 마음이 앞서도 회사에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임금과 각종 복지 수준을 결정할 수밖에 없어 대기업 수준에는 아직 못 따라가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한다”며 겸손해한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직원들의 식사, 입는 옷, 하다못해 탈의실 옷장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크레텍책임㈜을 두고 ‘웬만한 대기업 못지않다’라고 평가한다.


◆이제 세계 최고를 꿈꾼다

군 복무를 마치고 공구 행상을 시작할 당시 공구상의 사회적 위치는 최하위 직업군이었다. 당연히 최 회장도 “계속 이런 모습으로 살 것인가?”라는 고민이 깊었다.
그래서 “최, 영, 수! 내 이름 석 자에 책임을 지자. 지금 내 나이의 두 배가 되는 쉰 살에는 한국 최고가 되자”라고 다짐을 했다. 처음 은행거래를 위해 만든 도장에는 가운데에 이름 석 자 ‘최영수’를 쓰고, 가장자리로 둥글게 ‘Korea First Man’이라고 새겼다. 은행 여직원이 도장을 찍어 보고는 최 회장을 쳐다보며 웃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에게 미래는 ‘다가올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꿈을 이뤘다. 한국 산업공구 유통의 확실한 1인자의 위치에 올랐다. IMF 외환 위기도, 글로벌 금융 위기도, 대기업의 물량 공세도 최 회장을 이기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최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미국, 독일, 일본의 글로벌 공구 유통 업체들이 호시탐탐 한국 시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중국 업체까지 가세할 조짐입니다. 이제 크레텍책임㈜에게 국내 기업들 간의 경쟁은 의미가 없습니다. 글로벌 기업의 한국 도전을 막아내고, 해외시장으로 진출해야 할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최 회장은 이제 ‘한국 최고’가 아니라 ‘세계 최고’를 꿈꾸기 시작한 셈이다.  





크레텍책임(주)의 출발점이 된 ‘책임보장공구사’ 모습.


크레텍책임 이름 독특한데…CREative+TEChnology 고객에 무한 책임 합성어

크레텍책임㈜은 그 이름에서 어떤 회사인지 알 수 있다. 크레텍(CRET EC)은 CR Eative (창의)와 TEC hnolog y(기술)가 결합한 말이다.‘책임’은 ‘고객의 요청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지겠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책임’이란 말은 회사의 출발과 함께 기업의 정신이 되었다. 1971년 자전거를 끌고 공구를 팔며 문을 연 가게 이름이 ‘책임보장공구사’였다. 창립 45년 만인 지난해 자회사 크레텍웰딩을 포함해 4천억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했다.
크레텍책임㈜이 우리나라 공구유통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고, 대기업과의 경쟁에서도 당당히 최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공구유통은 과학이다’는 신념의 철저한 실천에 그 비결이 있다.
일본 산업공구카탈로그에 의존하던 1980년대, 국내 최초로‘기계공구 대백과사전’을 내놓은 게 전환점이 되었다. 업계 최초의 표준가격제와 바코드 도입, 전자주문시스템, 온라인주문시스템 CTX, 차세대통합정보시스템 등 공구유통의 전산화`정보화를 이끌어 왔다.
그동안 축적된 방대한 자료(빅데이터)와 노하우, 최첨단 정보시스템 등은 대기업조차 감히 넘볼 수 없는 업계 최강자로 만들었다.
대구 중구 달성로 본사 이외에 서대구물류센터(연면적 4천950평)를 2015년 5월에 완공했고, 공구업계 최대 규모인 서울통합물류센터(연면적 9천 평)가 조만간 완공을 앞두고 있다.

석민 선임기자 sukm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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