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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주부에서 여성 CEO되기까지 (주)써보레 장영숙 대표



주부에서 여성 CEO 되기까지

㈜써보레 장영숙 대표이사



가정주부 영업사원 되다
 
㈜ 써보레는 29년 전 나의 동반자인 서운수 회장이 국내 최초로 자동용접면을 개발해 특허 출원 후 시장에 내놓으면서 1989년에 설립된 회사다. ㈜써보레가 설립될 당시에는 산업현장에서는 안전에 대해서 무지인 상태라 시기적으로 좀 이른 제품이었다. 자동면에 대한 정보가 없던 때라 소비자들에게 알리는 것부터가 큰 난관이었다. 그 시절에는 지역마다 영업자들이 있어 유통업체에 홍보를 나갔으나 그 벽은 너무나 높았다. 결국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둘 포기하고 떠나는 실정이었다. 
당시 나는 40대 아녀자로써 남편 사업의 뒷바라지 그리고 시어른 모시고 자식 교육에 충실 하는 것만이 전부였던 전형적인 가정주부였다. 제품 출시 전 5년이란 개발기간 동안 투자된 자금이 어마어마한 빚으로 남아 하루하루 숨을 조여 오는데 무슨 특단의 조치 없이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등을 떠밀려 난생처음 자의반 타의반 카탈로그와 샘플을 챙겨 무작정 자동면 시장에 뛰어들었다. “얘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 있다”는 시어머님의 말씀이 힘이 되었고 남편의 적극적인 응원과 주위 사람들의 뜨거운 배려 속에 그렇게 나의 제 2의 인생은 시작되었다.


 
써보레는 내 인생의 전부
 
운전을 못하던 때라 버스와 전철을 타고 용접현장을 찾아 구두굽이 닳고 닳도록 하루 종일 걸었다. 여자가 용접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냐고 농담하고 웃으면 자존심 상하고 나를 이런 곳으로 내보낸 남편이 한없이 야속하고 서러워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러나 누구를 원망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이 길이 아니면 나는 살 길이 없다고 다짐하면서 다시 일어서야 했다. 그 후엔 무작정 업체 방문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으로 우선 전화로 담당자와 통화해 어떤 제품이란 걸 설명하고 방문해도 좋다는 약속 시간을 잡아서 나가야만 만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잡상인 취급으로 경비실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때는 용접 현장에는 여자가 없던 시절이다. 하지만 여자였기에 장점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영업할 때 사람들은 세 번 놀랐다고들 한다. 첫째, 용접면 영업을 위해 찾아온 사람이 여성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둘째, 제품의 성능을 테스트 해보고선 그 우수함에 놀라고. 셋째, 가격을 물어보고는 재래식면에 비해 가격이 월등히 높아 놀랐다. 그러나 내가 현장에서 확인한 시장 반응은 너무나 뜨거웠다. 누가 이렇게 좋은 제품을 개발했느냐고, 용접사들에게 꼭 필요한 제품이라고 가는 곳마다 찬사가 넘쳤다. 그런 반응 덕분에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아! 제품 성능만 완벽하면 우리는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신념을 가지고 그동안 열심히 홍보한 덕분에 조금씩 판매가 늘어났다. 그러는 중 우리 제품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시 나는 개발자인 남편에게 우리 제품에 문제가 있으니 좀 더 개선해 완벽한 제품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설득해 생산을 일시 중단하고 재개발에 들어갔다. 그동안 열심히 홍보도 하고 더 좋은 제품으로 다시 찾아오겠다고 인사도 하면서 현장의 반응과 요구사항을 조사할 수 있어 제품 개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완벽하면서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면서 현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초창기 우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홍보할 수 있는 기회는 전시회가 유일했다. 안전보건전시회(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주최), 국제용접전(용접협동조합 주최) 전시회 때면 우리 부스 앞에는 고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와 설명해 주기 바빠서 점심도 굶고 저녁때가 되면 녹초가 되어도 신바람이 났다. “아! 써보레가 죽지 않았군요.” 하는 격려와 감탄사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우리 어깨에 높이 날 수 있는 날개를 달아 주었다. 잃는 것이 있었음에 얻는 것도 있었다는 사실과 무조건 현장의 목소리와 소비자들의 반응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받았다.

 
일본시장 개척 위한 늦깎이 공부
 
그동안 국내 영업을 일 년 정도 하니 소비자들과 공구유통업자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두렵기만 하던 고객과의 만남과 소통도 원만해지고 시장 흐름을 느낄 수 있어 언제 누가, 어디에서 나를 불러도 두려움 없이 찾아가 내 제품을 홍보할 수 있는 당당함과 영업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도 생겼다. 국내 시장은 안정이 되어갔다. 그 때만 해도 일본 시장에서 인정받으며 다른 나라에선 믿고 사줄 수 있다고 할 만큼 일본 시장의 인지도가 높았다.
그 즈음에 일본 바이어가 우리 제품을 가져가기 위해 매달 우리 회사를 방문해 상담할 때 한국의 통역사를 동행해왔다. 그것을 보면서 나도 우리 제품의 기능에 대해서만큼은 내가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겠다 결심하고 일본어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그 후 일본 전시회에 참석해서 우리 제품을 선보이고 바이어들과 대화를 해보니 일본어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해 역사와 전통, 사회 문화와 같은 폭 넓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욕심도 생겨났다. 
뒤늦은 나이에 방송통신대 일본학과에 도전했다. 학위 따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과의 진심어린 소통으로 인간적으로 믿고 거래할 수 있기를 원해서였다. 쉽지는 않았다. 가정과 직장과 공부 세 가지를 병행해야하니 적지 않은 나이에 정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렵고 힘든 써보레의 영업도 했는데 공부쯤이야 할 수 있겠지 하는 용기로 무모한 도전을 했다. 결국 4년 만에 영광의 학사모를 쓸 수 있었다. 나 스스로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또 꿈은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덕분에 지금은 미국이 제 1의 시장, 일본이 제 2의 시장 규모로 써보레의 중요 고객이다. 국내는 브랜드로 돈독한 신뢰 관계로 영원한 동반자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결코 쉽지 않은 경영인의 자리

몇 년 전부터 나는 써보레의 대표직을 맡고 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막중한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하는 설레임으로 조심스럽게 동반자로부터 경영을 배우고 있다.
경영자의 자리란 절대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직원들과 단합해서 행복한 일터가 되도록 만들어가는 힘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설립 초창기부터 개발에 전념하는 남편을 도와 원자재(부품)부터 생산(조립)을 했던 경험과 안정된 후에는 재정을 담당하기까지 무지에서 밑바닥 시장을 개척해왔고, 성장해가는 과정에 뼈를 깎는 고통을 인내하면서 함께 한곳을 바라보며 노력해 이만큼 하나하나 이루어왔기에 그 누구보다도 가장 적임자라는 남편의 인정과 배려와 권유에 힘입어 마지막 도전을 하고 있다. 말만 듣던 기업 대표라는 자리, 이 자리에 막상 서보니 무엇 하나 쉽게 이루어지는 게 없고 돈과 시간과 노력(즉 교육비) 없이는 절대로 공짜로 얻어지는 게 없다는 걸 터득했다. 
대표자의 판단과 결정이 회사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책임자라는 걸 명심하게 된다. 그동안 선구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남편의 고충은 얼마나 힘들고 고독한 자리였을까 다시금 절실히 느끼게 된다. 훌륭한 제품이 출시되어 시장에 좋은 반응을 얻더라도 경쟁업체들의 끈질긴 추격과 중국산 저가 제품의 무서운 공세,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 여러 정책들의 악재들도 우리 제조사 및 중소형 기업들의 미래를 어렵고 불확실하게 만든다.
다행하게도 오로지 한 품목에 끝없는 연구개발로 30년 동안을 한 우물만 판 땀과, 열정과 끈기로 써보레의 제품은 미국 시장과 일본, 유럽 각국으로 진출하였고 지난해, 또 세계 최초로 새로운 신제품 용접 고글(아크쉴드1.2)이 출시되었다. 국내시장에서도 큰 획을 그었지만 세계시장에서도 써보레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음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지금의 써보레가 있기까지는 용접사들과 공구인들의 힘찬 응원과 격려, 따뜻한 사랑과 배려가 있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써보레가 용접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고 산업 현장에서 브랜드로 우뚝 설 수 있게된 것을 이 지면을 통해 감사하며 큰 절을 올리고 싶다. 앞으로도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사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으며 용접사들의 건강과 안전은 우리 써보레가 책임지겠다고 감히 장담해본다.

글·사진 _ 한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