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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애국지사 공구인 김상옥

 

애국지사 공구인, 김상옥(金相玉)

 

공구상 운영하며 마련한 자금, 독립운동에 사용
종로 경찰서에 폭탄투척, 왜경 수 백 명과 홀로 싸워

 

 

 

 

 

공구인 독립운동가가 있다. 서울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점을 경영하며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김상옥(金相玉, 1890. 1. 5 ~ 1923. 1. 22)의사가 주인공. 서울 동대문에서 영덕철물상점을 운영하던
김상옥 의사는 20대 후반에 비밀결사 광복단 조직에 참여하고 의열단에 가입하여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다. 이후 일본경찰 4백여 명과 혼자서 서울 시내에서 총격전을 치른다. 
치열한 접전 끝에 십 수 명의 일본경찰을 사살한 그는 마지막 남은 한 발 탄환으로 자결한다. 

 

 

 

혼란했던 시대, 철물점 창업에 도전


김상옥 의사는 1890년 서울 동대문 효제동에서 전직 군인이었던 아버지 김귀현과 부인 김씨 사이 4남매 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가정은 그가 8세 때부터 쳇불(체의 그물) 공장 직공으로 일을 해야 할 정도로 빈곤했다. 구한말 당시에는 가는 철사도 귀해 말의 꼬리인 말총으로 쳇불을 만들었는데, 이 경험으로 그는 훗날 철물점을 하면서 말총모자를 만들어 많은 돈을 벌게 된다. 김상옥 의사는 14세 때 부터 대장간에서 말발굽을 제조하는 직원으로 일을 시작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힘든 대장간의 풀무질, 망치질을 감당할 정도로 힘이 좋았고 성실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은 현대식 공장에서 각종 공구가 생산되고 공구상에서 판매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구한말에서는 각종 공구, 농기구는 풀무질과 망치질을 하는 대장간에서 생산되고 또한 판매되었다. 이때 김상옥 의사는 위, 아래 형제들과 함께 쇠를 다루며 괭이, 호미, 낫, 쇠스랑, 편자 등 각종 생활과 농사에 필요한 공구를 만드는 기술을 익힌다. 17세에는 기독교에 입교해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야학교에서 공부를 하는데 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하자 그는 직접 동흥야학교를 설립하는 면모를 보이며 배움에 대한 남다른 정열을 보였다. 주경야독하는 사람은 꿈과 배포도 남다르기 마련이다. 김상옥 선생은 철물점 창업을 계획한다. 그리고 마침내 1912년 10월. 23세의 나이로 대장간 겸 철물점인 영덕철물상점을 설립한다.

 


약장사로 목돈을 모아 철물점 차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영덕철물상점이 김상옥 의사의 첫 사업은 아니다.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려고 1911년 22살의 나이로 동대문 근처에서 기독교 서점을 연 것이 그의 첫 사업이었다. 이것은 그가 1910년, YMCA 소속 ‘황성기독교청년학관’의 야간 영어과에 입학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를 한 영향이 컸다. 낮에는 대장간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주말에는 당시의 지식인 그룹인 전문학교, 고등보등학교 학생들과 친분을 쌓는다. 덕분에 그는 다양한 지식을 쌓았고 식민지배의 암울한 현실을 깨닫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힘들게 대장간 일을 하여 모은 돈으로 1911년에 문을 연 기독교 서점은 적자였다. 고민을 하던 그는 1년 만에 서점 경영을 그만두고 충청, 전라, 경상지역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며 상비약을 유통하는 매약행상 일을 한다. 그의 장사 수완은 대단했던 것 같다. 그는 공터에서 사람들을 모아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상비약을 판매하고 기독교복음을 전파하는 연설을 하다가 그 연설이 이내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연설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그의 연설을 듣게 된 또 다른 독립운동가 ‘한훈’ 의사는 김상옥 의사의 연설을 듣고 그의 남다름을 알게 되어 친구로 그리고 독립운동을 함께하는 동지로 인연을 맺게 된다. 1912년 5월부터 10월까지 김상옥 의사는 6개월 간 전국을 돌면서 매약행상으로 큰 이문을 남겼고 동시에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알게 된다.


공구철물로 돈 벌고 말총모자로 성공해


형제가 함께 일 하는 공구상은 예나 지금이나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100년 전 인물인 김상옥 의사도 마찬가지다. 형인 김춘옥, 동생 김춘원과 함께 그가 세운 공구상은 요즘 시대의 형제 공구상들처럼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웃으며 우애롭게 각종 공구를 판매했을 것이다. 삼형제가 힘을 모아 일하자 동대문에 위치했던 ‘영덕철물상점’은 지속적으로 번창해 그의 가족은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다.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으면서 공구상을 성공적으로 운영했고 집도 사고 또 이를 되팔면서 김상옥 의사의 자산은 불어나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시대는 어두웠다. 1917년 당시 한국 국내 산업에서 한국인의 자본금은 일본인의 15분의 1, 생산은 10분의 1에 불과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경제도 종속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김상옥 의사는 이겨내려 노력했다. 영덕철물상점 한 구석에 양말, 장갑 짜는 기계를 들이고, 농기구 및 말편자 작업장도 확장했다. 동시에 ‘말총모자’를 제조하여 이를 보급하면서 국산품 생산 및 소비 장려운동, 일본 상품 배척운동을 전개한다. 번창하는 공구상과 더불어 그가 판매하는 말총모자가 사람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면서 김상옥 의사의 공구상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함께 일하는 직원이 50명이 넘게 되었다.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매진


김상옥 의사의 독립운동은 1913년 경북에서 채기중, 유창순, 한훈 등과 함께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한 것이 시작이다. 1912년 공구상을 시작한 직후부터 그는 독립운동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1919년 3.1 운동을 체험하면서부터다. 전국 각지에서 울린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서울 동대문에 위치한 영덕철물상점 김상옥 대표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게 한다. 그도 직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여학생을 폭행하려는 일본 경찰을 때려눕히며 군도(軍刀)를 빼앗기도 했다. 직원 수 50명을 넘은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으니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공구상을 형제들에게 맡기고 그해 4월 1일 동대문교회 내 영국인 피어슨여사의 집에서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한다. 혁신단은 4월 17일 독립운동 소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논설을 게재한 <혁신공보>1호의 발행을 시작으로 그해 9월까지 매회 1천부씩 지하신문을 비롯해 임시정부후원회 취지서, 항일전단을 제작, 배포하였다.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된 김상옥 의사는 40여 일간 고문과 다름없는 조사를 받는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일본 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 받게 되면서 동시에 김의사는 무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고되고 힘든 독립운동의 길


1920년 1월 초순 김상옥 의사는 만주 소재 독립군단체 북로군정서에서 파견된 김동순을 만나 무력투쟁을 협의한다. 또한 권총 40정, 탄환 3천발을 휴대한 친구이자 독립운동가 ‘한훈’과도 재회해 독립투쟁을 함께 모색한다. 그리하여 김상옥 의사는 1920년 8월 24일 미국 의원단이 서울을 방문 할 때 조선총독과 일제고관, 친일파를 한 번에 살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나 거사 하루 전 8월 23일 동지인 한훈, 김동순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계획은 실패하게 되고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상해생활은 일본 경찰의 추적으로부터 자유롭고 안전한 분위기였다. 김상옥 의사는 상해 임시정부요원들을 만나 친분을 쌓았고 의열단에도 가입을 한다. 동시에 또 다시 독립운동을 준비하며 지속적으로 많은 책을 읽고 사격술을 연마했다. 1922년 11월 말 그는 임시정부의 배웅아래 동지 안홍한과 함께 권총 4정과 탄환 8백발 그리고 항일문서를 가지고 12월 1일 서울로 잠입한다.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조선총독을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탄압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그는 동지들과 작별할 때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는 말을 남긴다. 

 

종로경찰서 폭파와 고독한 시가전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준비한 폭탄을 던지자 큰 폭발음이 서울 시내에 울려 퍼진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에 수 많은 사람들은 흥분했다. 식민지 탄압의 상징과도 같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터진 것은 참으로 통쾌한 일이었다. 이후 왜경의 눈을 피해 그는 용산 삼판동(현 후암동)에 살고 있는 매부 고봉근의 집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한인순사 조용수의 염탐과 밀고로 1월 17일 새벽 종로경찰서의 무장한 순사 17명이 고봉근의 집을 포위한다. 이때 김상옥 의사는 두 손에 든 권총으로 홀로 총격전을 벌인다. 종로경찰서 유도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순식간에 사살하고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 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추격하는 일본 경찰을 따돌렸다. 급하게 집을 나오느라 눈 덮인 남산을 맨발로 넘어 효제동에 살고 있는 동지 이혜수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추적은 집요했다.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의 총지휘 아래 4개 경찰서에서 차출한 4백여 명(천여 명이라고도 한다)의 무장경찰이 그를 잡기 위해 동원되었다. 1월 22일 새벽 5시 반경 이혜수의 집을 일본 경찰은 겹겹이 포위하였다. 김상옥 의사를 잡기 위해 구로다 경부를 비롯한 일본 경찰 여러명이 지붕을 타고 집 안으로 들이닥치자 김의사는 왜경 구로다 경부를 사살한 후 벽장 담을 뚫고 순식간에 옆집으로 피신한다. 이후 그는 인근 5채의 가옥을 넘나들며 권총과 장총으로 무장한 수 백 명의 왜경과 시가전을 벌인다. 수 백 명의 왜경도 그를 한 번에 제압하지 못했다. 무려 3시간 동안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며 김상옥 의사는 십 수 명의 왜경을 사살한다. 그러나 그가 가진 탄환은 많지 않았다. 3시간 동안 왜경들과 싸우니 어느덧 탄환은 오직 한 발뿐. 이제는 항복하거나 혹은 자결만 남았을 뿐이다. 수 백 명과 싸우니 몸 곳곳에도 총상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어 달아나기도 쉽지 않았다. 김상옥 의사는 마음을 굳힌다. 자결을 할지언정 결코 적의 포로가 되지 않겠다는 임시정부요원들에게 했던 말 그대로 그는 스스로 최후를 맞이한다.

 

 

애국지사 김상옥, 공구인은 그를 기억해야


김상옥 의사는 20대 때 철물점을 세운 후 사업적으로도 성공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국독립을 생의 목표로 삼고 만주와 중국대륙을 떠돌며 왜경의 추적을 받는 고난의 길을 자청했다. 적지나 다름없는 서울에 잠입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왜경 수 백 명과 대적하며 십 수 명을 처단했다. 그가 소중한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은 겨레와 후손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살게 하고 싶은 열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현재 그의 유해는 서울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삶을 기억할 수 있는 장소는 서울 시내에도 있다. 현재 마로니에 공원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는데 동상이 자리한 그곳이 바로 그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라고 한다. 또한 그가 폭탄을 투척한 자리인 종각역 8번 출입구 앞에는 그의 행적을 기리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가 공구를 팔던 영덕철물상점은 흥인지문 근처다. 지금의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6번 출구 근처로 전해진다. 우연히 1호선 동대문역 6번 출구를 지나간다면, 마로니에 공원을 걷는다면, 종각역 8번 출구를 간다면 선배 공구인이자 독립운동가 김상옥 의사의 삶을 한 번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나라와 겨레를 위해 불꽃처럼 뜨거운 삶을 살았던 공구인 김상옥 의사가 있었다. 

 

 

글·사진 _ 한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