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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한 수] 승부사 이세돌
2016년 알파고와의 대국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인간이 바둑에서 인공지능을 이기기 어려운 시대가 열렸고, 더는 예전 방식으로 바둑을 둘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 대국은 단순한 승부가 아니었다. 바둑의 미래, 그리고 인간의 위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사건이었다. 정말 우리가 그동안 두어온 방식이 옳았던 걸까? 우리가 옳다고 믿은 그 감각은, 어쩌면 착각이었던 건 아닐까? 그동안의 이론과 판단이 무너지는 경험은 단순한 충격이 아니라 기나긴 성찰로 이어졌다.
바둑을 둘 때 섣불리 움직이는 건 마치 혼자 바둑을 두는 것과 같다. 상대의 수를 깊이 읽지 못한 채 경솔하게 돌을 놓는 순간, 그 한 수가 순식간에 판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두어서도 안 되겠지만 경솔하고 섣부른 행동을 하기보다 신중하게 생각하는 편이 낫다. 바둑판 위에서는 단 한 수로 흐름이 완전히 뒤집힌다. 감정에 휘둘리거나 불안함이 앞서 손이 먼저 나가면 그 돌은 반드시 약점이 된다. 바둑은 느리지만 냉정한 싸움이다. 우리는 매일 선택 앞에 선다. 크든 작든, 그 선택이 쌓여 지금의 삶이 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된다. 그래서 나는 어떤 상황이든 먼저 차분히 생각하려 한다. 중요한 건 속도보다 방향이다. 길을 잃었을 때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 있는 것도 괜찮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건 새로운 일을 전혀 시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 말 만큼 실패의 본질을 간결하게 짚어주는 것이 또 있을까. 정확한 출처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불분명함이 이 문장의 보편성과 설득력을 방증한다. 누가 처음 말했든 간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하는 삶이야말로 진짜 도전의 증거라는 사실에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여기에서 실패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실패를 뜻하며 확실히 무언가를 얻었음을 가정한다. 세상은 성공과 실패, 그 둘로만 나뉘지 않는다. 심지어 이기고 지는 것이 분명한 승부의 세계에서도 성공은 종종 실패에 빚진다. 실패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과정의 일부일 뿐이며, 그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다음 길이 열리기도 한다. 어쩌던 가장 멋진 승리는 그렇게 수많은 패배를 통과한 끝에 비로소 도달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바둑을 둘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이 있다면 바로 ‘상식’과 ‘효율’이다. 돌이켜 보면 바둑뿐 아니라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도 이 원칙을 지켜왔다. 선택지 중에 가장 상식적이고 효율적인 것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 길을 택했다. 명백한 정답 앞에서 굳이 돌아가지 않았고, 두어야 할 수가 보이면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너무 복잡해지면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건 효율적이지 않다. 기준이 명확하면 한결 쉽게 선택할 수 있다. 이 판단이 상식적인가, 효율적인가 이 두 가지만 따져보면 되기 때문이다. 고민해야 할 요소가 여러 가지겠지만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면 인생의 효율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Who? 이 세 돌
일곱 살 때 바둑을 지켜보던 중 훈수를 하다 뺨을 맞은 적이 있었다. 지금 같으면 큰일 날 일이지만 당시 아버지는 오히려 상대에게 사과하셨다. 그만큼 바둑에서 훈수는 금기이기 때문이다. 바둑은 철저히 일대일 게임이기에 제3자의 개입은 룰과 예의를 모두 어기는 행위다. 인생에도 훈수를 두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훈수는 훈수일 뿐.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결국 돌을 놓고, 그 돌을 책임질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인생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자신이 쌓아온 가치관과 신념으로 판단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다른 이들의 훈수는 참고 사항 정도로 넘기면 그만이다. 바둑도, 그리고 인생도. 남들이 정해놓은 길을 그대로 따라가기보다 자신만의 가치관과 판단으로 한 수 한 수 놓아갔으면 한다. 우리 삶은 우리 선택으로 결정되는 것이니까.
나는 2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바둑을 두며 살아왔다. 긴 여정 속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꼽으라면 단연 2016년 알파고와의 대국을 들 수 있다. 그 한 판은 나에게도, 바둑계 전체에도 커다란 충격이자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알파고 이후로 인공지능이 바둑의 길을 제시하는 시대가 되었다. 프로 기사들조차 인공지능이 선택한 수를 분석하며 공부하고 있다. 알파고와의 대국 이후 약 10년. 바둑계가 크게 달라졌듯 세상 역시 급속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섰다. 이제 우리는 본격적인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변화의 속도가 한층 높아졌으며 더 이상 ‘인공지능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묻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오히려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해야 할 때다.
이제 우리는 인공지능과 경쟁하는 시대가 아니라 협업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인공지능에는 고정관념이 없다. 기존의 글이나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며 답을 찾아낸다. 반면 인간은 오랜 시간 익숙한 틀 속에서 사고하며 살아왔다. 이제는 그 틀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변화의 흐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제대로 준비하며, 함께 방향을 잡아가려는 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기술은 더 이상 기술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삶과 맞닿아 있는 사회 전체의 문제이자 함께 풀어가야 할 미래의 이야기다. 지금부터라도 함께 고민하고 준비해 나간다면 변화의 한가운데서도 각자의 중심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더 나은 미래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글 _ 이세돌 / 정리 _ 한상훈 /사진 _ 이세돌 인스타그램 / 자료출처 및 제공 _ 도서 ‘이세돌, 인생의 수읽기’, 웅진지식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