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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CULTURE

농기계&공구 없으면 드라마 '도깨비' 메밀밭도 없죠


농기계 & 공구 없으면 드라마 ‘도깨비’ 메밀밭도 없죠

경관농업가 진영호





전북 고창군에 위치한 ‘학원농장’은 드라마, 영화, CF촬영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수 만평의 면적에 전원적이면서도 토속적인 정취가 있는 풍경으로 가득하다. 봄과 여름이면 청보리를 심고 가을에는 지평선을 메운 메밀꽃 풍경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학원농장을 일구어낸 경관농업가 진영호씨와 그가 가진 ‘공구’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영화, 드라마 촬영 장소로 유명해

 
이곳은 사진을 즐겨 찍는 사람들에게 무척 유명한 장소다. 주말마다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고 간다. MBC 드라마 ‘신돈’, KBS TV문학관
 ‘메밀꽃 필 무렵’, 영화 ‘웰컴투 동막골’과 ‘식객’의 촬영 장소로 이름을 알렸고 최근에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와 ‘도깨비’의 촬영 장소로 이름이 알려졌다. 이 학원농장의 주인은 ‘진의종(陳懿鍾)’ 전 국무총리의 장남인 ‘진영호’씨다. 학원농장이 유명해지기까지 진영호 대표와 그의 부모가 쏟은 정성은 마치 한편의 소설과 같다. 
“지금이야 이름이 좀 알려졌지만 처음 아버지 어머니께서 농장을 운영하실 때만 하더라도 황무지나 다름이 없었어요. 길도 없었으니까요. 제 어머니가 가진 꿈은 외국 영화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농장을 가지시는 것이 꿈이셨어요. 헐리우드 영화 ‘자이언트’와 ‘에덴의 동쪽’에 등장하는 미국 텍사스 농장을 보시고 그것을 꿈꾸셨죠. 제가 중학생일 때 아버지 어머니께서 고향땅인 고창에 있는 30만평 황무지를 구매하셨어요. 그 이후 임대도 하고 오동나무, 삼나무, 뽕나무를 심어 양잠을 했죠.”
30만평의 땅을 구매했다고 하면 엄청난 돈이 들어간 것 같지만 땅도 땅 나름이다. 전기도 수도도 없고 도로도 없는 1960년대 황무지 땅은 한 평 가격이 막걸리 한 잔 값도 안 되는 가격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황무지를 30만평이나 구매한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서울대 출신 대기업 임원, 농사꾼 되다
 
진영호씨가 본격적으로 농장에서 일을 한 것은 1992년부터다. 그전까지 금호 그룹에서 20년을 일했고 회사에서도 임원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 일을 하면서도 자신은 언젠가 다시 농장에 돌아와 농장을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틈틈이 농장일 관련하여 외국의 사례도 살펴보고 기계 설비도 눈여겨보았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농사일은 1992년부터지만 농사일에 완전 초짜는 아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살면서 학창시절 방학 때 마다 농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어머니인 ‘이학’ 여사는 그가 농장을 잘 이끌어주길 원했기에 자연스럽게 대학 전공도 농업으로 택했다. 1971년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호기롭게 농사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1년 좀 넘어 도망쳤다고 한다.
“20대 청년의 나는 경험도 없었고 지식도 부족했고 열의만 가득했었어요. 농사일을 하는 환경도 열악했고요. 그때 전기도 없었고 수도도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길도 없었고요. 그 도중에 농사일을 시작하는데 집에서 일제 경운기를 한 대 사주시더라고요. 지금은 경운기가 얼마 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경운기가 귀했습니다. 자동차도 귀했던 시절이니까요. 문제는 경운기가 고장이 났을 때입니다. 작은 고장이 나더라도 고창에서는 수리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설비도 없었어요. 큰 도시에 가서 수리를 해야 하는데 그때 고창과 광주광역시를 오가는 차가 하루에 4편 밖에 없었죠. 한번 고장나면 아무리 바빠도 수리하는데 최소한 2일은 걸려요. 돈은 돈대로 들고요. 농사는 또 농사대로 잘 안되더라고요. 그때 제가 양잠을 했습니다. 뽕나무를 심어서 뽕잎으로 누에를 키워 누에고치를 얻어야 하는데 뽕잎이 다 같은 뽕잎이 아닙니다. 뽕잎도 크고 두꺼운 것이 좋죠. 그런데 황무지여서 그런지 뽕나무가 잘 안자라고 잎도 작고 얇아요. 그런 뽕잎을 먹은 누에는 힘이 없으니 비단의 원료가 되는 누에고치도 잘 나오지 않고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기업에 취직했죠. 20대 때 이야기입니다.”    

 
농사, 수지타산 맞아야 지속 가능해

이후 20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하며 승승장구하고 대기업의 임원까지 지냈다. 그런 그가 다시 농장에 돌아와 농사일을 했다. 어머니 혼자 힘들게 관리하는 농장을 외면하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그가 농장에 돌아온 1990년대는 농업 시장이 개방되어 농산물 시장이 작아지던 때였다. 손이 많이 가는 수박농사를 그만두고 보리를 심기로 한다. 보리는 이익은 적지만 인건비가 적게 들어가는 작물이다. 
“농장이 몇 만평이 넘어가면 인건비도 크게 들어갑니다. 직접적인 농사일을 하는 것 보다 인력을 수급하는 것이 더 큰 일입니다. 농사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인력을 고정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일 이니까요. 농사는 겨울철에는 그렇게 일이 많지 않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겨울이 되면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요. 결국 인력이 많이 들어가는 작물을 재배하면 그때 그때 인력을 수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 시기에 수확을 못하면 농사 망치는 거죠. 사람만 확보한다고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오면 식사도 준비해야 하고 관련 공구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력을 제 때 확보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죠. 여러 사람들과 두루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농사는 농한기에는 몇 사람 일 하지 않다가 갑자기 많은 일손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그렇기에 기업처럼 1년 내내 일하는 정직원을 두고 경영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잠깐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같은 사람들이 오기에 관계도 돈독하게 유지해야 한다. 어느 한 사람과도 척을 지어서는 안된다. 마치 공구상 경영과도 같다.
 
호미도 상황에 따라 가격 중요해

큰 농장을 경영하기에 사용하는 공구가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생각보다 보유한 공구가 많지 않고 값비싼 농공구도 별로 없다. 
“저도 좋은 공구를 사용하고 싶죠. 그런데 좋은 공구는 분실되는 경우가 많아요. 농장이 넓고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공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죠. 그리고 몇 달이 아니라 며칠 일하는 일꾼들에게 낫을 한 자루씩 쥐어주면 보통 별 생각 없이 집에 가져가시거든요. 공구의 경우 일꾼에게 나누어주고 난 이후에는 관리가 잘 안되더라고요. 결국 낫을 사더라도 성능에 큰 하자가 없다면 가급적 저렴한 가격의 제품을 구매하여 나누어 주게 됩니다. 여기 농장에서 일손이 많이 필요할 때는 수 십 명이 일 하는데 농공구 정도는 제공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이제는 비싼 농기계는 구입보다 대여를 많이 해요. 저도 좋은 농기계 있으면 사고 싶죠. 그런데 기계라는 것이 고장 나거든요. 예전에 저도 일제 경운기를 보유 했다가 수리 및 관리로 많은 비용과 시간을 썼잖아요.  농사는 기계를 믿기 보다는 정성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죠. 그러다 중요한 시기에 기계 투입이 늦으면 그해 농사 망치게 됩니다. 그러니 적절한 시기에 대여를 받아 사용하는 것 편하죠. 기계 관리도 일이고 비용이 들어가니까요. 일손이 부족한데 차라리 대여가 편해요.”
많은 농기계를 대여해 해결하지만 꼭 필요한 농기계 몇몇은 보유하고 있다. 작은 땅이 아니라 대농장을 운영하기에 트랙터, 화물차는 꼭 보유해야 한다. 그가 20대 때 처음 농사를 지었을 때와는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농업도 시대에 따라 기계를 사용하고 방식도 달리 해야 살아남는다. 


 
경관농업은 기쁨과 상생의 농사법         

인건비가 덜 드는 보리를 심으니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밭의 모습은 장관이 되었다. 그 멋진 풍경에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갔다. 방문한 사람들이 쓰고 가는 돈이 생각보다는 컸다. 경관농업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 보리를 수확한 밭에 콩 대신 메밀을 심었다. 그 사이 카메라는 촬영이 어려운 필름 카메라에서 쉽게 찍을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로 변신하더니 보급형 DSLR카메라가 유행이 되었다. 일반인들도 카메라를 구매해 차를 타고 이곳저곳 들러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동시에 인터넷에 사진을 공유하면서 장소에 대한 소문이 자연스럽게 났다. 그가 경관농업을 하면서 드라마 영화 촬영지로 각광받고 방문객이 늘어나자 고창군은 2004년도에 지역축제 행사를 제의했다. 지역 주민들과 힘을 합해 처음으로 ‘청보리밭축제’를 치루었다. 첫 해 관광객이 27만 명이 몰렸다. 자신이 생겨 해마다 축제를 열기로 했다. 봄에는 ‘청보리밭축제’를 하고 가을에는 ‘메밀꽃잔치’를 한다. 각각 한 달쯤 열리는 이 행사에 매년 80만에서 100만의 관광객이 방문한다. 지역 주민들이 농장에 나와 음식을 만들어 팔고 미숫가루, 메밀가루, 보리쌀 등 기념품을 판매하자 새로운 소득이 창출 되어 주변 농가에서도 경관농업에 힘을 보태었다.
“방문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메밀꽃 잔치나 청보리밭 축제를 즐기는데 큰 돈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주차료를 받지도 않습니다. 누구나 언제든지 아무 때나 몇 번이고 오시면 됩니다. 방문하시는 손님들께 조금이라도 더 많은 볼거리를 드리기 위해 메밀도 시기를 나누어 심고 여름에는 해바라기를 심어서 보여 드리고 있습니다. 개화시기를 홈페이지에서 확인 하시고 방문하시면 누구나 좋은 풍경을 즐겁게 즐기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분 좋게 즐기시고 기뻐하는 그 모습만 보아도 저는 충분히 행복합니다.”        
이 일대는 전국 최초의 ‘경관농업특구’다. 현재 8개 마을 250여 가구 농민들이 경관보전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노력하고 있다. 조용한 시골마을이 전국 명소로 바뀌게 되면서 그는 어릴 때부터 가슴에 품었던 꿈을 이루었다고 말 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앞으로도 보다 신선한 볼거리와 더 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 농촌의 새로운 활로를 찾겠다고. 

글·사진_한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