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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CULTURE

청계천 공구거리 오랜 사랑방, 을지다방


청계천 공구거리의 오랜 사랑방 을지로3가역 5번 출구
 
을지다방
 




요즘은 시골에 가도 찾아보기 힘든 ‘다방’이라는 이름. 화장분을 칠하듯 커피숍으로 카페로 이름을 바꾸고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눈치 받지 않고 마음 편히 쉴 공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청계천 공구거리에는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청계천을 방문한 이들의 마음 편한 사랑방 역할을 해 온 곳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싸한 쌍화차 향이 떠오르는 그곳. 을지다방이다.

난로 위 주전자, 레자 소파… 80년대의 기억
 
을지로 3가역 5번 출구.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을지면옥 입구 오른편의 계단을 오르면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다방이 나타난다. 을지다방이 바로 그곳이다. 계단 끝 미닫이문으로 들어서면 눈에 들어오는, 공기를 따듯하게 데워 주는 석유난로와 난로 위의 주전자 그리고 공간을 빽빽이 채우고 있는 낡은 황토색 레자 소파로부터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7~80년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바쁘고 급하게 돌아가는 현대의 서울이지만 그곳에서는 그 시절의 낭만과 여유가 느껴진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네 분의 노신사가 다방을 찾았다. 익숙한 얼굴들인지 주인장은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그들은 자리에 앉아 당연하다는 듯 커피를 한 잔씩 주문한다. 청계천변의 다방에서 ‘다방 커피’를 앞에 둔 채 요즈음의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소설 <천변풍경>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구보 씨 박태원과 시인 이상이 드나들며 문학에 대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대해 논하던 다방의 모습. 근무하던 공직에서 정년퇴직했다는 70대의 신사들은 모더니즘을 주창하던 청년들처럼 커피를 즐기는 태도가 사뭇 태연하다. 을지다방의 분위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리라.
젊은 시절부터 이곳을 찾았다는 그들은 단골손님을 자처한다. 그들 뿐 아니라 청계천 인근의 모든 이들은 언제고 마음 편히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을지다방을 청계천의 오래된 사랑방이라 부른다.

 
34년째 을지다방을 운영하고 있는 박옥분 씨
 
지금 다방이 위치한 곳에는 반세기 전부터 다방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을지다방’이란 이름의 간판을 단 사람은 다방의 세 번째 주인이자 지금 을지다방을 운영하고 있는 박옥분 씨다. 1985년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우연찮게 다방을 인수한 후부터 오늘날까지 34년째 이곳 을지다방을 운영해 왔다.
“원래는 닫혀 있던 다방이었어. 청계천 복개 공사로 지금은 바로 옆에 길도 나고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좋은 자리가 아니었어 여기가. 이 건물이 을지면옥 건물이거든. 내가 돈도 없던 20대 시절에 을지면옥 분들이 혜택을 많이 주신 덕분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거야. 내가 들어와서 을지다방이라는 간판도 달았지.”
을지다방이 문을 연 80년대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에는 다방이 말도 못하게 많았다. 도로 근처 매 건물마다 다방 하나씩은 꼭 있었을 정도로. 청계천은 물론 전국이 호황이었던 그때 그 시절. 당시에는 공구상에 손님이 물건을 사러 오면 커피부터 배달 주문해 대접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박옥분 씨는 말한다.
“다방에 한참 직원이 많을 때는 아홉 명까지 있었어. 그때는 배달도 엄청 많았지. 배달이 그렇게 많았으니까 아가씨들을 그렇게 쓴 거야. 워낙 바빠서 가서 커피를 따라만 주고 왔어. 카운터에서 주문 전화 받는 애까지 뒀었지 그때는. 그리고 주방아줌마도 있었고. 그럴 때였어.”

 
계란 동동 쌍화차 제조법은 영업 비밀
 
아홉 명까지 직원이 있었다는 을지다방이지만 지금 다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박옥분 씨 혼자다. 자판기가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판매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믹스커피가 대중화되고 정수기와 냉온수기가 등장한 후부터는 주문이 뚝 끊겨버렸다. 게다가 90년대 말 우리나라에 IMF경제위기가 닥친 후에는 커피 주문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대의 수많았던 다방들조차도 버티지 못하고 하나 둘씩 문을 닫았다.
“요즘에도 배달은 몇 군데 가. 아침마다 공구상 사람들 서넛이 모여서 커피를 마시거든. 우리 다방이 오래 됐으니까 우리한테 주문을 하는 거야.”
여전히 을지다방에 주문을 하는 이유가 오래 됐다는 것뿐일까. 특별한 을지다방 쌍화차의 맛도 주문의 한 이유일 것이다.
을지다방의 대표 메뉴는 바로 쌍화차다. 너무 뜨겁지 않은 적당한 온도에 코끝을 스치는 알싸한 계피와 감초의 향. 고소하게 씹히는 견과류와 말려 저민 대추까지 정말 모든 점에서 완벽하다. 진하고 걸쭉한 것이 차인지 죽인지 구별이 힘들 정도다. 거기에 동동 띄워진 계란 노른자가 맛의 방점을 찍는다. 쌍화차 제조법을 묻는 질문에 그녀는 절대 알려줄 수 없다 말한다.
“그건 영업 비밀이니까 말해줄 수 없지. 그래도 조금 알려주자면 모든 재료를 적당하게 넣는 것, 그게 비법이라면 비법이야.”
 
 
여직원들 손가락 사이즈 여전히 기억해
 
비법이 담겨 있는 을지다방 쌍화차의 값은 한 잔에 4,000원. 과연 원가나 나올지 의심이 되는 저렴한 가격이다. 그리고 다방 커피는 2,500원. 박옥분 씨는 손님들과 함께 지낸 시간의 인연과 약속이 있는데 어떻게 가격을 올리겠냐고 말한다. 만약 다른 직원을 둬야 한다면 가격을 올릴 필요가 있겠지만 자기 혼자서 하는 입장에서는 그러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마음 따듯한 그녀의 사람 대함은 단지 손님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과거 다방에서 함께 일하던 직원들에게도 그녀는 직원을 대하는 대표로서가 아니라 나이 조금 많은 언니처럼, 그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감싸 주는 후원자처럼 대했다.
“그저께, 예전에 우리 가게에 있던 애가 전화가 왔어. 언니 잘 계셨어요? 한 번 뵈러 가야 되는데… 그러길래 그럼 한 번 와라 그랬지. 나는 일하던 직원이 그만 뒀는데 사람을 금방 못 구하면 그 봉급을 일하던 아이들한테 나눠줬어. 또 한 달 넘게 사람을 못 구하면 여직원들 집에 전화를 한 대씩 놔주기도 하고. 당시에 전화가 얼마나 드물어. 한 대에 그때 돈으로 25만원씩 했었어.”
현금, 전화 설치 또는 금붙이로 여직원들에게 마음을 베푼 그녀. 아직까지 과거 가게에 있던 직원들의 손가락 사이즈가 기억난다는 박옥분 씨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단골인 다방
 
문이 열리며 또 한 무리의 손님이 들어왔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셋이다. 초행은 아닌 듯, 주인에게 인사를 건넨 한 남자가 일행에게 말을 던진다.
“여기 우리 아버지도 자주 오시는 데야. 쌍화차 드시러. 여기서는 쌍화차 마셔야 해. 스타벅스보다 여기가 백배 좋아.”
세대차가 나는 아버지와 아들이 둘 다 즐겨 찾는 다방이 이곳 말고 또 있을까.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지금도 을지다방을 기억하고 찾는 단골들이 여럿이다. 육군 사관학교 출신들의 오랜 모임 장소로도 기억되는 곳이다. 특히 육사 8기와 9기 동문들이 자주 다방을 찾는다. 그리고 고등학교 동문들, 서울고등학교 경기고 경복고 용산고 동문들의 모임 장소로도 역할 해왔다. 을지다방이 그런 장소로서 사랑받아 온 건 주인장의 푸근한 인심 덕이다. 그녀가 말한다.
“우리 아버지가 항시 하시던 말씀이 ‘은혜는 은혜로 갚아야 한다’ 그리고 ‘남 탓을 하지 말아라’. 나는 그래. 내가 큰돈을 벌어 뭐하나 그냥 내 몸 먹고 살기만 하면 되지. 내가 지금 부자는 아니지만 먹고 사는데 그렇게 큰돈은 필요 없더라고.”
을지다방 여주인 박옥분 씨가 항상 하는 생각은 어떻게 하면 방문하는 손님들이 만족하고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라 한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또 지금껏 청계천에 을지다방이 남아 있을 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그녀의 이런 따뜻한 마음 아닐까.



을지다방   청계천 공구거리 을지로3가역 5번 출구 

글 _ 이대훈 · 사진 _ 정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