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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CULTURE

세운상가 이정성 마이스터

 

공구 들고 백남준과 전 세계를 누볐다

 

세운상가 이정성 마이스터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수백 대의 텔레비전으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은 일반 미술 작품과는 달리 전자제품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장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1988년부터 백남준 작가의 전속 기술자로 그와 함께 전세계를 다니며 작품을 설치하고 또 수리해 온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이정성 마이스터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그의 작품


비디오 아티스트, 전위예술가, ‘세계적인 예술가가 아니라 세기(世紀)적인 예술가’ 백남준. 그의 이름은 긴가민가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그의 작품을 보면 누구든 ‘아! 이 사람’ 하고 알아차릴 그. 1,003대의 텔레비전을 탑처럽 쌓아올린 <다다익선>, 텔레비전 150대로 벽을 만든 <메가트론>, 300여대의 텔레비전으로 미국 땅을 형상화한 <US MAP> 등 TV브라운관을 이용한 비디오아트의 세계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 백남준 작가.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미술에 별반 관심이 없던 관객도 누구나 넋을 잃고 작품에 빠져 들게 마련이다. 구식 텔레비전 본체야 그렇다 치더라도, 탑을 쌓고 벽으로 세워진 텔레비전 브라운관에서 관객에게 쏘아져 나오는 화면은 정말 80년대, 90년대에 만들어진 작품인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움을 선사한다. 
그런데 그의 작품의 아름다움이란 일반적인 예술, 다시 말해 ‘미술’과는 다른 면이 있다. 다른 미술 작품은 한 번 작업을 마치고 설치를 마치면 거기서 끝. 더는 손을 대지 않아도 되며 혹여 손을 더 댄다면 오히려 작품의 가치를 손상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백남준 작품의 기반은 텔레비전이라는 전자 제품이다. 전자 제품은 고장이 날 가능성도 존재하며 무엇보다 기기의 수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수리가 필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머릿속으로 작품을 구상하더라도 그것을 작가의 손으로 그리면 끝이 아니라 ‘설치’에 필요한 전자적인 기술 역시 필요하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궁금증이 생긴다. 작품을 위한 텔레비전의 설치며 고장 났을 때 수리는 누가 하는 걸까? 1988년부터 백남준 작품의 전속 기술자로 작가와 전 세계를 함께 누빈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이정성 마이스터다.

 

 

백남준 선생과의 첫 만남


세운상가 바로 인근 대림상가에는 아트마스타라는 이름의 사무실이 있다. 이정성 장인의 사무실이다. 사무실에서 만난 이정성 장인은 백남준 선생과의 만남을 묻는 질문에 1986년에 열렸던 전자·전기 전시회 ‘시트라86’ 이야기부터 꺼냈다.
“86년도에 지금 코엑스 자리에서 시트라86이라고 전자전시회가 있었어요. 우리나라 첫 전자 전시였는데 거기에 지금은 LG전자인 금성하고 삼성하고 맞붙어서 누가 기술력이 세냐 맞대결을 했어요. 그 때 삼성에서 뭘 했냐면 텔레비전 528대로 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벽 가운데에 64개 멀티비전(여러 개의 화면에 하나의 영상을 만들어 내거나 하나의 움직임을 동시에 표현하는 장치)을 설치했는데 그 때 멀티비전 모니터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전부 내가 텔레비전을 개조해서 만든 거였어요. 채널 돌리는 거부터 비디오 입력을 만들고 분배기 제작까지 내가 다 했어요.”
당시 이정성 장인은 영등포 유통상가에 있던 신성전자라는 사무실에서 일하던 때였다. 예전부터 삼성 측과 여러 작업을 해 왔던 장인은 시트라68에서의 대형 작품도 직접 설치했다. 그것이 백남준 선생과 맺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있지도 않았던 멀티비전 설치까지 내가 멋지게 해 냈다는 소식이 당시에 텔레비전 1,003대를 이용한 탑을 기획하고 있던 백남준 선생 귀에 들어간 거예요. 그 작품이 바로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다다익선>입니다. 내가 528대 벽을 쌓았는데 그거 한 놈이 1,003대라고 못 쌓겠어요? 삼성에서 나를 백남준 선생한테 추천한 거죠.”

 

 

공구가방 싸 들고 백남준과 세계 누벼


백남준의 역작, 다다익선의 설치는 성공적이었다. 당시 백남준이 찾던 기술자는 기술도 있어야겠지만 자신의 생각을 뱃속까지 면밀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한국인 기술자였다. 아무리 기술이 좋더라도 외국인 기술자와는 소통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랬던 백남준에게 이정성 장인과의 만남은 그야말로 수어지회(水魚之會), 꼭 필요한 만남이었다. 
그렇게 만난 둘은 이후 18년 동안 전 세계를 함께 돌아다녔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훨씬 유명했던 백남준 작가 작품의 외국 미술관 설치를 위해서였다.
“18년 동안 공구 가방, 부품 가방 싸가지고 세계를 돌아다녔습니다. 해외 출장갈 때 가방은 꼭 갖고 가야 돼요. 왜냐면 외국에서는 필요한 부품 주문하면 일주일씩 걸리거든요. 그러니까 고장이 예상되는 부품들을 바리바리 다 싸가지고 다녔던 거예요. 한 번은 취리히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찾아서 나가려는데 세관하고 싸움이 붙었어요. 걔들 말을 알아듣나요? 그래도 딱 보니까 세금 내라는 것 같더라고. 큰일나겠다 싶어서 한국말로 달려들었어요. 세금 못 낸다고 한국말로 큰소리 뻥뻥 치니까 공항 높은 사람이 나오더니 그냥 가라고 하더라고요.”
당시 취리히 공항에 내려 준비했던 전시는 세인트갈렌이라는 아름다운 도시의 미술관 전시였다. 그 지역은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3국의 꼭짓점에 있는 지역이라서 호수를 한 바퀴 돌면 3개국을 다 다닐 수 있었다.
“내가 평생 스위스에 언제 또 오겠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만 해도 백남준 선생님 작품 작업하는 게 내 평생 직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런데 보니까 전 유럽에 안 다닌 나라가 없을 만큼 여러 나라들을 다녔더라고요.”

 

 

인생에 찾아온 기회와 도전


처음 자신을 찾아 온 백남준 선생을 따라 외국으로 나갈 마음을 먹었던 것에 대해 이정성 장인은 일탈이자 도전 그리고 외도였다고 말한다.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 작은형이 가지고 왔던 라디오에 푹 빠져 서울 을지로에 있던 국제TV학원에서 텔레비전, 라디오를 배워 작은 전파상에서 일하고 있던 자신이 백남준이라는 작가와 만났다는 건 인생에 있어 하나의 ‘기회’였고 그 기회를 잡았던 것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던 거라고.
“사람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게 인생인 것 같아요. 영등포 신성전자에서 일할 때만 해도 내가 가방 싸가지고 그렇게나 해외 나들이를 할 줄을 꿈에도 생각 못 했죠.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겠어요. 88년에 다다익선 끝나고 89년도에 미국 위트니 미술관에 텔레비전 68대 설치를 하러 갔는데 미국 공항에 딱 도착하자마자 내 인생에서 뭔가가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좌우간 그렇게 내 해외여행이 시작됐던 거죠. 1988년부터 백남준 선생이 돌아가신 2006년 까지.”

 

백남준의 죽음… 그 이후의 일상


2006년 미국 마이애미에서 백남준 선생은 유명을 달리했다. 이정성 장인은 그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처음에 신문 뉴스 보고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걸 알았어요. 그 소식을 듣고 미국으로 메일을 보냈어요. 장례식에 정식으로 가고 싶다고. 메일에 답장을 받은 게 장례식 바로 전날이에요. 시간이 부족했는데 다행히도 시차 덕분에 장례식 날 아침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참석객들 가운데 내가 제일 먼저 왔더라고요. 선생님 부인과 아들도 밥 먹으러 가고 나 혼자 관 속에 누워 있는 선생님이랑 얘기를 많이 했어요. 뭐 오만 말 다 했죠. 사람들은 선생을 괴짜로만 생각하는데, 저에게는 정말 잘 해준 분이시거든요. 평범하기만 했던 제 인생의 길을 바꿔 준 분이기도 하고요. 고맙다는 말을 했었던 것 같아요.”
백남준 선생님의 죽음 이후 이정성 장인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작품의 유지 보수와 해외 전시 때면 작품 설치를 위한 출장. 작품의 전속 기술자임은 작가의 사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작품 <다다익선>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백 선생은 이정성 장인에게 <다다익선>에 대한 관리 전권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다다익선의 미래와 이정성 장인의 현재


지금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다다익선>은 전원이 꺼져 있는 상태다. 작품 노후화에 따른 고장으로 1/3가량의 텔레비전이 상영되지 않는 상태였고 작품 내부의 발열로 화재 위험이 있다는 의견에 따라서다. 작품 철수 의견마저도 나오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이정성 장인은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다.
“지금 분위기를 보면 작품을 치울 궁리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작품 관리하기가 정말 힘들거든요. 텔레비전이 1,003대가 있는데 여기저기 고장 안 날 수가 있겠어요? 게다가 수리도 무척 어려워요. 높은 탑 모양이라서 위쪽 모니터가 고장나면 구조물을 세워서 밟고 올라가야 해요. 구조물 한 번 세우려면 천만원이 넘게 들어요. 설치하고 나중에 백선생님이 ‘그거 한 10% 고장나는 건 그냥 놔두자’ 그런 말씀까지 하셨다고. 그런 작품 관리가 힘드니까 치우자고 하는 것 같은데 내 얘기는, 맨날 고장나서 애 먹이니 안에 내장을 싹 들어내 버리고 브라운관을 LCD로 바꾸자. 그런데도 고지식한 미술계 윗양반들이 말을 안 들어요. 입만 벌리면 그거 없애고 싶어 난리들이야. 없애려면 나한테 동의를 구해야 하거든. 내가 지금 가만히 보고 있어요.”
과거 진공관(브라운관) 이었던 텔레비전이 지금은 전부 LCD로 바뀌었다. 이정성 장인이 하는 일도 변할 수밖에 없다. 과거 진공관 작품이었던 백남준의 작품들도 말년에는 액정TV로 바뀌어 갔다. 그런 기술의 변화를 이정성은 계속해 독학을 통해 익혀 왔다. 기술의 세계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젊은이들에 뒤지지 않고 맞상대하기 위해서 말이다. 
외람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정성 장인 사후에는 작품 관리를 하느냐 묻는 질문에 장인은 필요 없는 걱정이라는 말투로 세상일은 다 돌아가는 법이라 대답했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게 다 그래요. 내가 없어도 아무 문제없이 다 돌아가는 법이에요. 내일 일을 오늘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인생도 그렇고 세상일도 그렇고 걱정보다는 충실하게 살아가는 게 옳은 삶의 방법입니다.”

글 · 사진 _ 이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