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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CULTURE

을지로가 회춘하다

 

을지로가 회춘하다

 

대한민국 산업현장의 대명사 을지로가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낮과 다른 밤, 을지로의 골목을 누비며 과거와 오늘을 오가는 을지로의 변화를 만나본다

 

 

 

못 만드는 것이 없는 곳 


을지로 

 

우리나라 근대화의 주역

 
을지로는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성에서 그 지명이 유래됐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명칭을 개정할 때 우리 명현, 명장의 이름을 따 붙이면서 을지로로 제정된 것. 그렇게 오늘의 을지로는 과거의 흔적과 삶의 터전, 그리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전이 공존하는 곳이 됐다. 특히 6·25 전쟁 이후 무너진 도시를 재건하기 위한 모든 것, 즉 공구, 철물, 목재, 수도배관, 페인트 등 여러 산업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급속히 발전해왔다. 전쟁 때는 군수용품이, 또 섬유류가 호황일 때는 미싱 상가가, 도시 성장을 위해서는 조명과 타일도기, 가구가 호황을 누렸다. 
을지로3가와 4가 일대는 그렇게 우리나라 근대화의 역사를 이룬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못 만드는 것이 없는 곳’,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전설적인 명성을 날렸던 을지로가 최근 도심재창조라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새롭게 변화되고 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만큼 뜨거운 삶의 열기 

 
종로와 을지로를 가로지르는 청계천은 무성하게 자란 나무와 잔잔하게 흐르는 물길로 도심의 열기를 식힌다. 여유롭게 산책하거나 한가롭게 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는 사람들로 물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깔끔하게 정비된 청계천을 뒤로 하고 공구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특화거리로 지정된 곳이 길 따라 속속 나온다. 골목골목 누비다 보면 여기가 무슨 특화거리인지 구분하기보다 자연스럽게 공구도 보고, 타일도기도 보고, 조명거리도 만나게 되는 곳이 이곳이다.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어떠한 영역으로 반듯하게 구분 짓기보다 서로의 삶이 얼기설기 서로 맞물린 채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고요히 흐르는 청계천 뒤로 이렇게 치열한 삶의 모습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세월 묻은 골목이 끝없이 연결된 곳

 
서울 지하철 3호선 을지로3가역 6번 출구로 나와 바로 보이는 골목에 들어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붓글씨 그대로의 간판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빛바래고 칠이 벗겨진 글자 사이로 정밀, 정공, 금속, 공업 등의 글자가 보인다. 간판에서 유추할 수 있듯 철강소와 정밀·금형 가공업체들이 모여 있는 이곳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공장들이 모여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단순히 ‘공장이 많다’란 말로 정리하기에는 굽이굽이 세월 묻은 골목이 촘촘하고도 끝이 없이 연결돼 있다. 
대낮의 열기에도 프레스 가공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한 기술자분은 이 자리에서만 18년째란다. 그의 오래된 작업실은 숱한 세월과 노고를 알려주듯 기름때 묻은 공구와 도구들이 어지럽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생소한 단어가 눈에 띈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영어 또는 일본어로 된 단어들이 변모하며 남겨진 잔해들이다. ‘삘딍, 빠우, 시보리’ 등 뜻을 알 듯 말 듯한 단어가 곳곳에 보이지만 격세지감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더욱 친근하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이러한 점들 덕분에 을지로는 70~80년대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거리로 손꼽히며 많은 예술가들과 작업자들, 디자이너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됐다. 중구청이 청년예술가들에게 빈 점포를 임대해주면서 ‘퍼블릭쇼’, ‘R3028’ 등 청년 예술가들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의 핫 플레이스, 을지로

 
최근 한 연구소가 ‘2018 상반기 밀레니얼 세대 트렌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젊은 층이 좋아하는 핫 플레이스로 을지로가 꼽혔다. 밀레니얼은 1982~2000년 사이에 태어난 신세대를 일컫는 말로 근대문화의 감성을 간직한 을지로에 새로운 감각의 카페, 음식점 등이 생기면서 명소가 된 것. 특히 ‘커피한약방’은 낡은 벽면에 근대시대 한약방을 재현해놓은 듯한 빈티지 인테리어와 한약을 짓듯 정성들여 내린 커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커피한약방이 세대와 상관없이 인기를 얻자 바로 맞은편에 ‘혜민당’이란 빵집까지 내어 명실공히 골목의 숨은 명소로 자리 잡았다. 이외에도 ‘호랑이’, ‘호텔수선화’, ‘잔’ 등 을지로카페로 명성을 얻고 있는 카페만 해도 여러 곳이다. 

 

 

 

을지로에서 일하고 을지로에서 논다

 

 

 

 

추억 돋는 노포가 인기명소로

 
을지로 곳곳에는 공장과 상가 사이로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음식점과 오래된 노포들이 성업 중이다. 과거 일에 지친 일꾼들을 반겼을 다양한 음식들을 맛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됐다. 그 중에서도 오구반점은 창업자 왕수달 씨가 종로에서 가게를 하다가 1953년에 지금의 장소(을지로3가 5-9번지)로 이전해 와 오구반점이 되었다. 3대째 내려오고 있는 을지로 터줏대감이다. 직장인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건 가벼운 주머니에도 만족할 만한 식사와 소주 한잔이 아닐까. 올해로 37년째 맞는 동원집은 지금의 자리에서만 32년째다. 고기가 푸짐하게 담긴 감자국과 순대국은 출근길 빈속을 든든히 채워주는 을지로 명물. 아침 9시에 문을 열어 밤 10시가 되어야 문을 닫는 이곳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방문하는 맛집이다. 4~5시에는 브레이크타임을 가지고 저녁장사를 준비한다고. 60년 전통 갈비로 유명한 안성집, 소곱창 맛집 우일집, 1946년 개업한 평양냉면 전문점 우래옥 등 을지로에는 맛과 전통을 갖춘 음식점이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그대는 낮보다 밤이 아름다워


인근 상인들의 바쁜 일과가 끝나는 저녁시간이면 공구가게들의 셔터가 내려지고, 낮에는 한가롭기만 하던 골목어귀에 파란색 간이 테이블이 하나둘씩 차려진다. 골목골목 생맥주집이 빼곡히 들어선 이 거리에 오후 6시가 지나면서 하나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것. 낮과 밤이 다른 을지로에서만 만날 수 있는 색다른 풍경으로 어느새 골목길에는 출입문 없는 대형 매장이 차려지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어느 맥주집인지 그 경계를 알 수는 없지만 자리만 잡고 앉으면 금세 맥주와 팝콘을 내어준다. 이곳이 바로 40년 역사를 이어온 ‘을지로 노가리골목’으로 서울의 미래유산에 지정된 명소다. 

 

 

지난 6월 22일~23일에는 노가리골목 일대에 생맥주 한잔 1천원 하는 ‘노맥축제’가 열렸다. 노릇노릇 잘 구워낸 노가리 역시 한마리 1천원. 착한 가격 역시 노가리골목의 매력이다. 을지로 노가리골목의 원조는 ‘을지OB베어’로 노가리 안주를 처음 선보인 곳이다 ‘뮌헨호프’는 1989년 5월 시작해 현재까지 유일하게 창업주가 운영하고 있다. ‘만선호프’는 노가리골목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으로 옥상도 잘 꾸며 놨다. 이렇게 하나둘 맥주집이 들어서면서 수백명의 인파가 모이는 을지로 노가리골목이 탄생한 것. 큰 길 건너편에는 을지로의 또다른 밤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을지로 골뱅이골목이 그것. 여름밤 시원한 생맥주 한잔이면 노가리인들, 골뱅이인들 무엇이 문제이겠나. 좋은 사람과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는 깊은 밤, 바로 을지로의 밤이다. 

 

 

 

다시 을지로 새로운 세대의 도래

 

 

 

오늘의 변화를 만든 과거에 감사하며


을지로의 랜드마크 세운상가는 ‘세상의 모든 기운이 다 모이는 상가’라는 이름으로 1967년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세워졌으나 한때 철거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지난 2015년 ‘다시 세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광장을 만들고 청계보행로를 상가 상부와 연결하는 1단계 공사로 청계 대림상가와 세운상가를 연결하는 공중데크가 완성됐다. 새로운 이름 ‘Makercity Sewoon’에 걸맞게 보행데크 구간에는 29개의 창업공간도 마련됐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것은 물론 확 트인 연결통로와 종묘부터 남산까지 서울의 심장부를 360도 감상할 수 있는 9층 옥상은 새로운 볼거리다. 세운전자박물관은 기술 발전의 기틀을 다진 세운상가와 청계천 일대의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곳곳에는 기술에 대한 열정하나로 뭉친 아날로그 장인들과 디지털시대 후배들의 공동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변화가 누구에게나 좋은 것만은 아닌 듯 하다. 재생된 도시공간 옆 청계3,4지구는 현재 ‘철거몸살’을 앓고 있다. 청계상가를 거닐다 보면 빨간 띠를 두른 상인들과 곳곳에 부착된 철거반대 현수막을 발견할 수 있다.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놓인 상인들은 미래가 불안하기만 할 것이다. 도시재생으로 옛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공존하는 지금의 을지로, 새로운 변화 뒷면의 불편한 진실은 새것과 옛것과의 사이에서 늘 우왕좌왕하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 우리의 과거는 오늘 못지 않게 중요하다.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되 앞선 세대들에 대한 고마움은 잊지 말자.   

 

 

글・사진 김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