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CULTURE
공구로 만들어내는 소리 - 폴리 아티스트 정지수
공구로 만들어내는 소리
폴리 아티스트 정지수
공구를 가지고 만들 수 있는 것을 떠올려보라 하면 어떤 이는 목재 가구를, 또 다른 이는 금속 조형물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폴리 아티스트 정지수씨는 공구로 만들어 낼 그 어떤 소리를 떠올린다.
만 가지 도구로 만들어내는 만 가지 소리
까칠한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이미지로 유명한 주지훈 배우가 왕세자와 거지 1인 2역을 한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세자로 분한 거지 주지훈이 임금님의 변기 매화틀에 앉아 급히 대변을 보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래쪽은 비출 수 없으니 어깨 위 세자의 얼굴만 비추는 장면으로부터 소리가 들려온다. 뱃속 부글거리는 소리와 주루룩 묽은 그것이 새어나오는 소리. 그와 동반된 방귀 소리며 바닥에 떨어져 철썩 하는 소리까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소리다. 생생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찌푸리며 ‘아니 이런 소리는 대체 누가 낸 소리지?’ 하고 궁금해 하던 내게 누군가 말했다. “그 소리는 폴리 아티스트 정지수 씨가 낸 소리란다.”
폴리 아티스트(Foley Artist)라는 낯선 단어는 영화 등의 영상물에서 바로 그 영상에 맞는 각종 소리를 만들어내는 직업을 의미한다. 영화 속에서 들려오는 대사와 음악을 제외한 모든 소리를 만들어내는 사람. 그가 바로 폴리 아티스트다. 자, 누가 낸 소리인지는 알아냈고 어떻게 낸 소리인지가 궁금하다. 혹시 직접?
“제가 직접… 낸 소리이긴 한데, 그렇다고 전부 몸으로 낸 소리는 아니고요. 하하하. 일단 뱃속 부글거리는 소리는 밥을 많이 먹은 후에 제 뱃속 소리를 녹음한 거긴 해요. 그리고 주루룩 하는 소리와 떨어지는 소리는 바나나랑 식빵 그리고 헤어 젤이랑 토마토케첩 이런 것들을 이용해 만들어서 표현한 소리예요.”
바나나, 식빵, 토마토케첩으로 만든 소리라니. 정말이지 놀라운 생생함이다.
영화 속 소리 예술가 폴리 아티스트
정지수 씨가 속해 있는 ‘C-47 스튜디오’는 영화의 음향과 영상을 편집하는 회사다. 회사의 사운드 팀에는 사운드 이펙트 에디터, 다이얼로그 에디터 등 여러 직책의 사람들이 있지만 ‘아티스트’라는 직책명으로 불리는 이는 폴리 아티스트 정지수 씨 혼자뿐이다. 그럴 만도 한 게, 아무 것도 정해진 것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자신만의 생각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소리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소리를 만드는 데는 매뉴얼적으로 정해진 게 없어요. 자기가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영상에 맞게 소리만 만들어 내면 전혀 문제될 것 없거든요. 그런 창조적인 작업을 하고 자기만의 생각과 노하우로 소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폴리 ‘아티스트’라는 직책명을 쓰는 것 같아요.”
공구를 이용해 만들어내는 다양한 소리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든 영상에 맞는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그는 작업실 근처, 철물점들에도 자주 방문한다. 그곳에는 수도 없이 많은,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공구’들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공구를 이용해 만들어 낸 소리들은 수도 없이 많다. 대표적인 소리는 3M작업장갑(NBR폼 코팅장갑)과 클립을 이용해 만든 ‘개 달리는 소리’다.
“예전에는 유리창에 붙이는 공기 완충재(뽁뽁이) 있잖아요. 그걸 사용해서 개 달리는 소리를 만들었는데 발톱이 땅에 닿는 느낌이 잘 안 나더라고요. 그러다 유튜브에서 다른 아티스트가 장갑에 클립을 붙여 소리를 내는 영상을 본 거예요. ‘괜찮겠네’ 해서 작업해 봤는데 소리가 정말 괜찮게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개 발바닥 소리는 뽁뽁이로 녹음하고 뛸 때 발톱 소리는 장갑에 클립을 끼워서 표현했죠.”
철물점에서 주로 판매하는 문손잡이도 소리를 만들어내는 주 공구다. 문손잡이로 만드는 소리는 놀랍게도 ‘총 소리’다.
“발사될 때의 소리는 물론 다른 소리죠. 그런데 장전하는 장면이나 들어서 겨누는 소리 표현하기에는 철컥 하는 문손잡이 소리가 굉장히 좋아요.”
뿐만 아니라 고무로 된 핫팩 주머니를 젖은 아크릴판에 비벼 브레이크를 밟았을 때의 바퀴 마찰음(스키드음)을 표현하고 사극에서 칼 뽑는 소리는 칼과 철재 자를 마찰시켜 만들어 낸다. 또 자물쇠와 열쇠도 있다. 과연 그렇다면 그것들로는 어떤 소리를 표현할까?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자. 열쇠로 자물쇠 여는 소리를 표현한다.
이처럼 정지수 아티스트에게 철물점이란 공간은 자신의 작업을 도와주는 보물 창고인 셈이다.
사람의 발을 바라보는 남과 다른 시선
그가 스튜디오에서 폴리 아티스트 직책을 맡은 지도 올해로 10년 차. 그동안 <악녀>, <끝까지 간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내가 살인범이다>등 40편이 넘는 영화의 폴리 작업을 해 왔다. 작업을 시작한 초기에는 영화 상 특정적인 장면에서 사용되는 특별한 소리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클라이막스나 주요한 이벤트에서 사용된 소리들. 그러나 여러 작품을 진행해오면서 깨닫게 된 건 기본적으로 깔리는 사람의 발소리나 옷 소리 같은 소리들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말한 것처럼 영화에서 인물의 발소리와 옷 소리는 기본적으로 깔리는 소리다. 그렇다면 그 소리는 실제 영화 촬영 현장에서 녹음되는 것일까?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 영화상에서 들려오는 거의 모든 발걸음 소리와 옷 소리는 촬영 이후 폴리 아티스트가 새로 녹음해 영상에 삽입되는 소리다. 관객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인물의 걸음 소리와 옷 소리. 그만큼 자연스럽게 소리를 녹음하는 것이 폴리 아티스트의 중요 과제다.
그것을 깨닫고 난 이후, 정지수 씨는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그에 따른 발소리를 주의 깊게 관찰하면 연구하게 됐다고 한다.
“출근이나 퇴근하면서 사람들의 발을 이렇게 봐요.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게, 그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속에서도 제가 한 사람의 신발을 바라보면 그 사람 발소리가 들려요. 또 발걸음을 보고 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의 기분도 파악되는 거예요. 신기하죠? 정말이에요.”
만물창고에서 탄생하는 소리, 소리들
런닝화면 런닝화, 스니커즈면 스니커즈, 구두면 구두, 하이힐이면 하이힐… 십여 켤레의 신발과 각종 도구가 쌓여 있는 그의 작업장에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물건들이 수도 없이 많다. ‘만물창고(萬物倉庫)’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그 공간에서 정지수 아티스트는 오늘도 만 개의 도구로 만 개의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말씀드린 것처럼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에는 매뉴얼이 없거든요. 매번 새 작품 할 때마다 새로운 걸 계속 시도하게 돼요. 그렇게 해서 마음에 드는 소리가 나왔을 때면 정말 기분이 좋아요. 그런 경험이 계속되다 보니까 폴리에 대한 매력이 점점 더 커지더라고요. 이 폴리 아티스트라는 직업이 굉장히 매력적인 직업인 건 틀림없는 것 같아요.”
글 · 사진 _ 이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