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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CULTURE

지금의 나를 만든 건 8할이 실패의 경험 - 야구감독 손경호의 승부수 비결

 

지금의 나를 만든 건 8할이 실패의 경험


야구감독 손경호의 승부수 비결

 

 

 

 

빙그레 타자 출신… 경상중학서 후학지도 15년
2015년 대구고 부임… 3년 만에 최대 부흥기 일궈
‘아마야구 최고 지도자’ 주목… 갤럭시노트9 광고도 촬영

 

재능보다 중요한 건 노력… 자만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


손경호 감독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대구고 운동장에서 만난 야구부원들은 다들 덩치가 상당했다. 1학년 선수들 가운데에도 키가 190cm에 가까운 선수들이 네다섯 명은 된다고 한다. 그런 신체 조건도 야구 선수에게 필요한 자질일 것이다. 하지만 손 감독은 선수로서의 성공의 열쇠는 소질보다 오히려 노력이 더 중요하다 말한다.
“물론 소질도 중요하죠.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노력 여하입니다. 소질을 타고났는데 거기다 노력도 열심히 한다. 그러면 정말 이승엽 선수 같은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런데 소질을 타고난 선수들을 보면 꾀를 많이 피워요. 제 실력을 믿으니까. 어렸을 땐 타고난 애들은 노력 안 해도 잘 하거든. 그런데 그런 아이들은 길게 못 가는 거죠. 그런 아이들 보다 오히려 노력형이 훨씬 나아요.”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항상 노력하고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라 지도하는 감독. 그가 그처럼 흔들리지 않는 최선의 노력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이 과거 경험했던 좌절과 실패의 경험을 아이들은 똑같이 경험하지 않길 바라서일지 모른다.
사실 프로 선수를 꿈꾸는 모든 이들의 마음은 똑같을 것이다. 프로 구단에 입단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선수로서 대성하는 것. 그런데 감독은 일단 프로에 지명받은 선수들은 생각을 잘못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프로 지명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다 자기 것이라는 생각. 온 세상이 자신을 도와줄 거라는 생각. 손경호 감독 자신 역시 그랬다.
“대학 졸업하고 빙그레 이글스(現 한화 이글스)에 지명을 받았어요.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죠 ‘지명을 받았으니 나는 이제 프로 선수다’. 그리고 한 달 정도를 술 마시고 실컷 놀았어요. 그러고 나서 1월 7일날 팀에 합류를 딱 하니까 몸이 하나도 준비가 안 된 거예요. 다른 선배 프로 선수들은 신인이 들어오면 다 경쟁자라고 생각해서 벌써 겨울에 몸 다 만들고 준비돼있는 상태인데 저는 그걸 모르고 한두달 허송세월 보냈던 거죠.”

 

 

피로골절로 인한 선수 생활 종료…실패의 경험이 성공의 열쇠 


프로 입단 첫 해는 2군행이었다. 단 한 차례도 1군 시합에 출전하지 못하고 계속 2군에서만. 시즌 전의 준비 부족이 크나큰 패인이었다. 다음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감독은 자신이 갖고 있는 신체능력 이상으로 과도한 훈련을 했다. 운동 선수들에게는 피해야만 하는 극심한 ‘오버페이스’를 진행한 감독에게 찾아온 건 신체 과부하에 따른 피로골절이었다.
“쉽게 말자자면 뼈가 멍든 거죠. 뼈에 근육통이 온 거예요. 정강이가 너무 아팠어요. 발을 짚고 뗄 때. 짚을 때도 통증이 오고 뗄 떼도 통증이 오는 거예요. 운동 선수는 계속 뛰고 달리는 게 생활인데….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제가 결혼을 일찍 해 와이프도 있는 상태에서 내가 과연 재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좌절감이 더 컸죠.”
그가 항상 선수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이다. 자신이 경험했던 선수 생활 중단의 이유. 한 순간도 방심하지 말고 평소 꾸준한 노력과 훈련만이 성공의 방법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해 줬던 좌절의 경험은 아이들만이 아닌 현재의 손경호 감독 자신에게도 ‘훌륭한 지도자’라는 이름을 갖게 해 준 열쇠였을 것이다. 지금도 감독은 누구보다 한 시간 먼저 운동장에 나와 훈련을 준비하고 다른 이들보다 한 시간 늦게 운동장을 떠난다. 선수뿐 아니라 지도자로서도 필요한 것은 부지런함이라는 마음가짐에서다.

 

 

창단 이래 최고 성적 대구고 야구부… 선수들 지도한 명장 손경호 감독


야구 명가로 불리는 대구고등학교 야구부가 개교 60주년인 올해 최대 부흥기를 맞았다. 1976년 야구부 창단 이후 대붕기 우승기를 8차례 휘둘렀고, 봉황대기에서는 두 차례 우승컵을 들어 올렸으며 전국체전은 물론 대통령배, 청룡기 등의 대회에서도 한차례 이상씩 우승 경험이 있는 야구 명문팀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하며 존재감을 잃었던 것이 사실. 2010년 봉황대기에서 역대 두번째 우승기를 휘날린 것을 마지막으로 고교 야구판에서 대구고의 활약 소식은 그야말로 감감무소식이었다.
조용하던 대구고 야구부가 창단 이래 최고 성적을 거뒀다. 5월 있었던 황금사자기 준우승을 기폭제로 하여 대통령기(8월)와 전국 70여개 고교야구팀 전체가 참여하는 봉황대기(9월)까지 연거푸 들어올렸다. 고교야구 메이저 대회로 꼽히는 네 개 대회 중 세 개에서 결승에 오르고 그 중 두 대회에서 우승한 것이다. 
자신만의 교육관으로 야구부를 지도한 손 감독이 있었던 덕에 대구고는 올해를 최고의 해로 일궈냈던 것일 테다.
대구고 25회 졸업생으로 1989년 프로 지명을 통해 잠시 프로야구 선수생활을 했던 손 감독은 앞서 말한 피로골절로 1991년 지도자의 길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한 뒤 영남대 코치, 경북고 코치를 거쳐 대구 경상중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해 경상중을 중학 야구 최고의 학교로 키웠다. 졸업 30년 만인 2015년 대구고로 돌아와 야구부의 지휘봉을 잡은 손 감독은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야구부를 기본부터 바꿔 나갔고 부임 3년만인 올해, 최고의 성적을 거머쥐었다.

 

 

경상중 야구부 10년 연속 우승… 타지역 선수들도 감독 따라 진학


손경호 감독의 지도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던 건 경상중학교 감독 시절부터다. 1999년 그가 감독으로 오자마자 경상중은 2000년에 곧장 청룡기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그걸 시작으로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 간, 단 한 차례도 빼놓지 않고 매년 우승을 독차지했다.
경상중을 야구 명문 중학교로 우뚝 세운 감독에게 연락이 온 건 대구고 총동문회였다.
“동문회 모임 자리에 나갔는데 동문들이 감독 자리를 맡아 달라 부탁하더라고요. 제가 경상중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고 또 대구고 야구부 출신이었다는 전통성이 있으니까 부탁한 거였죠. 사실 전 경상중 야구부를 최고로 만든 것에서 지도자로서의 인생을 마무리할 생각이었거든요. 제 나이가 인생으로 봐서는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야구 감독으로 봐서는 후반기에 접어든 나이예요. 그런 상황에서 과연 내가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좀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래도 동문들의 요구에 못 이겨 감독직을 맡은 손경호 감독. 감독이 대구고로 간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전국에서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진학을 희망해 왔다. 올해 말, 프로구단 지명을 받아 입단한 두 명의 야구부원들도 그런 선수들이다.
“한 명은 마산, 또 한 명은 울산에서 온 선수들이에요. 중학교 감독 시절 때 봤던 애들이죠. 자주 연습경기도 하고 시합에서도 만난 아이들인데 제가 대구고로 간다하니까 연락이 왔어요. 자기들도 오고 싶다고. 그 아이들 뿐 아니라 경상중에서 좋은 선수들도 같이 올라왔고요. 그 덕분에 좋은 결과가 났던 것 같습니다.”

 

지도자의 길로 이끌어준 스승… 이승엽 동상 건립에도 큰 역할 해


지금은 지도자의 길을 화려하게 걷고 있는 감독이지만 피로골절을 입고, 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 시작한 그의 선수 인생에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던 스물여덟, 스물아홉 그 시절엔 신체적 그리고 정신적 고통만이 있었다.
그랬던 그를 선수의 길이 아닌 지도자의 길로 인도해 줬던 건 도성세 감독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손경호 감독의 은사이자 국가대표 감독까지 지냈던 도성세 감독은 당시 자신이 감독을 맡고 있던 영남대로 손 감독을 불러 코치로서 지도자 수업을 받게 했다.
“저는 야구를 다 도성세 감독님에게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선수로서의 배움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배움도요.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로 저에게 도움을 주고 계시죠.”
부모는 자식의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항상 걱정이 앞서는 것처럼 도성세 감독도 언제나 손 감독과 대구고 걱정뿐이다. 올해 봉황대기 결승전을 앞두고 있던 때에도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 와 여러 조언을 건넸다 한다.
도성세 감독은 손 감독을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삼성라이온즈 이승엽 선수의 모교이기도 한 경상중에 이승엽 동상 건립을 후원한 크레텍책임 최영수 회장과 친구이기도 하다. 도 감독이 최영수 회장과 손 감독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덕분에 이승엽 선수의 동상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엽이가 제 10년 후배거든요. 그런데 회장님이 동상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사실 살아있는 사람 동상을 세운다는 게 좀 의아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회장님 말씀이 박지성 동상도 있다더라고요. 치밀하게 조사하신 모양이에요. 그 이야기를 듣고 승엽이한테 ‘박지성 동상도 있댄다’ 했더니 부담스러워하던 승엽이도 마음을 열었던 거죠.”

 

 

스마트폰 광고모델 섭외도… 야구경기장 근처 사는 것이 꿈


대구고 야구부의 우승 이후 또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손경호 감독을 찾았다. 바로 삼성 스마트폰 갤럭시노트9의 광고 모델 제의다. 텔레비전은 물론 유튜브 등 각종 SNS매체에서도 노출되는 CF. 세계 최고 브랜드 제품의 광고에 자신과 대구고 아이들이 출연한다니, 광고 제의를 받고 처음엔 놀랐다고 한다. 광고 촬영 경험은 아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됐다고 감독은 말한다.
“최영수 회장님께 전화해 ‘광고 찍었습니다’ 하니까 ‘무슨 광고?’ 하시길래 갤럭시노트9 광고라고 했더니 ‘야~ 출세했네’ 하시더라고요. 하하하. 광고비가 학교로 입금 되면 아이들과 여행이라도 한 번 갈 생각입니다. 다 함께 노력해서 만든 결과니까 같이 가야죠. 멀리 간다고 해 봐야 제주도겠지만요.”

 

 

전국 최강 고교 야구부인 대구고등학교 야구부. 그들을 이끈 손경호 감독의 인생 목표는 소박하다. 아내와 함께 대구 라이온즈파크 경기장 인근 주택으로 이사가는 것. 그러면 저녁 시간에 제자들이 경기하는 모습을 일상처럼 볼 수 있을 테니까. 앞으로 7~8년 후 감독 자리에서 은퇴한 뒤에는 그럴 수 있길 바란다는 것이 손 감독의 꿈이다.

 

글_ 이대훈 · 사진_ 황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