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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CULTURE

인생은 피할 곳 없는 사각링 버텨야 기회 온다 (챔피언 홍수환 인터뷰)

 

인생은 피할 곳 없는 사각링 버텨야 기회 온다

 

4전 5기 신화 챔피언 홍수환

 

 

 

 

챔피언 홍수환의 삶에는 언제나 빛과 어둠이 있었다. 그는 맨주먹 하나로 밴텀급 세계챔피언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타이틀 방어전에 실패하자 환호하던 사람들은 되려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파나마의 카라스키야와의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전에서 4번 다운된 뒤 다시 일어나 싸워 KO로 승리했다. 
4전5기 신화의 챔피언 홍수환은 포기를 모르는 남자다.

  

   

  

위기 가 아닌 순간 어디 있겠나


홍수환은 한국 최초의 2체급 석권 세계챔피언이며 지금 현재 강사 겸 방송인으로 활동한다. 동시에 한국권투위원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홍수환스타복싱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여러 기업, 관공서에서 강사로 활동하며 각종 예능프로에도 시원한 입담을 펼치고 있다. 칠순의 그가 아직까지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바로 4전5기 신화의 챔피언이어서다. 코로나와 경기불황 위기로 힘들어하는 공구인들에게 힘이 될 조언을 부탁하자 그는 바로 호통을 친다.
“위기가 아닌 순간이 어디 있어요? 힘들다고 포기하면 바로 패배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재산 다 바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힘들다고 주저앉아요? 포기하면 끝인데? 온 가족이 가장의 어깨만 보고 있는데 포기해요? 내가 복싱 좋아해서 시작했지만 챔피언 되어 돈 벌어 어머니께 효도하려고 챔피언 된 것도 있어요. 모두가 다 챔피언은 안되지만 누구나 챔피언이 될 수는 있습니다. 노력하면 누구나 챔피언이 됩니다. 챔피언이 특별합니까? 나도 사람이고 괴롭고 아프고 힘든 것은 똑같아요. 복싱 12라운드 36분. 쉬는 시간 12분. 총 48분 동안 때리고 막고 피해야 해요. 보는 사람도 지겨운데 하는 사람은 얼마나 지치고 지겹겠어요? 쓰러져서 기절하고 싶어도 기절하지도 않죠. 공은 울리죠. 시간은 흐르죠. 도망치거나 포기할 수도 없죠. 이처럼 인생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버텨야 기회가 옵니다.”
위기를 버티어서 힘내라는 말은 식상할 수 있다. 그러나 챔피언 홍수환의 버티라는 말은 그 무게가 다르다. 그의 굴곡진 인생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된다.

 

 
홍수환 아마추어 전적은 2전 2패

 
한국에서 챔피언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자동적으로 홍수환이 떠오른다. 그만큼 한국 복싱계에서 그의 존재감은 크다. 그러나 그도 시작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의 아마추어 전적은 2전 2패. 챔피언이 되기까지 쌓은 복싱 실력은 재능이 아닌 오직 꾸준히 노력한 결과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후배들 중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보다 운동신경은 있으나 성장이 약간 더딘 사람을 좋아한다. 
“아버지가 복싱을 참 좋아하셨어요. 자주 복싱 경기장에 데려가셨거든요.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께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사춘기였던 제게 큰 충격이었죠. 한국의 초대 복싱 챔피언은 김기수 선배님입니다. 김기수 선배가 장충체육관에서 이탈리아 니노 벤베누티를 15회까지 가서 판정으로 이겨서 챔피언이 됩니다. 김기수 선배는 카퍼레이드를 했고 시민들은 열광했습니다. 마치 영웅 같은 챔피언의 모습과 시민들의 열광 속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는 김기수 선배의 모습을 나는 보았죠. 그리고 결심했어요. 나도 반드시 복싱 챔피언이 되겠다. 아버지의 무덤에 챔피언 벨트를 바치겠다 결심했죠. 그런데 아마추어 성적은 신통치 않았어요. 프로 데뷔전은 무승부였고요. 눈탱이 밤탱이되어 3전 1무 2패가 된 나를 본 어머니가 너 한번은 이기고 관둬라고 오기를 부리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말이 제게 정말 큰 힘이 되었어요. 어머니의 그런 오기와 집념은 제게 전달됩니다.”
챔피언은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패배를 뛰어넘는 피나는 노력을 요구한다. 홍수환은 노력 끝에 프로 데뷔 2년 만에 한국에서는 적수를 찾아 볼 수 없는 한국 챔피언이 되고 1972년에는 동양챔피언을 획득한다. 이후 세계랭킹 순위권에 올라 1974년 7월 3일 아놀드 테일러와 밴텀급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치른다.  

 

 

결정의 순간 머뭇거리지 마라

 
홍수환은 챔피언이 되는 길은 오직 노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자세와 투지를 강조한다. 그는 아놀드 테일러와의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오른손 부상을 입고도 끝내 챔피언 벨트를 차지한다. 
“경기장에 가는 일 자체가 고생이었어요. 그때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이라는 도시까지 가는 시간만 35시간이 걸렸어요. 도쿄, 홍콩, 스리랑카, 세일추일스, 요하네스버그를 거치며 비행기를 6번이나 갈아탔어요. 정말 지겹고 지치는 여행이었죠. 상대방 정보도 없었어요. 세계 챔피언이 백인이고 나보다 키가 크다는 정도의 정보만 있었죠. 챔피언 타이틀전이 이루어진 것도 운이었어요, 아놀드 테일러는 나를 손쉬운 상대로 보고 상대선수로 지명한 겁니다. 1차 방어전 상대로 느닷없이 나를 지명했으니까. 적지에서 치러지는 원정경기는 부담스럽고 컨디션 조절도 아주 힘듭니다. 그래도 주어진 기회를 머뭇거리지 않아야 합니다. 져도 좋다. 끝까지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남아공까지 간거죠. 승기는 잡았지만 경기 라운드가 계속되면서 오른손이 아프더라고. 오른손에 부상이 온거죠. 고통스러웠지만 주먹 부서져라 휘둘렀어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니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으니까. 챔피언 벨트가 눈 앞에 있으니 오른손의 고통을 잊고 모든 것을 걸었죠.” 
그날 홍수환은 아놀드 테일러를 1, 5, 14, 15회 한 차례씩 다운시킨 끝에 판정승을 거둔다. 한국에서는 라디오 생방송으로 중계가 되고 있었다. 오전 7시, 환호하던 사람들의 귀에 홍수환과 어머니 황농선 여사의 대화가 라디오 방송으로 울려퍼진다. ‘엄마 나 참피온 먹었어.’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챔피언의 영광과 좌절 그리고 도전

 
홍수환의 주먹은 권투를 하기에는 작고 약한 주먹이다. 그런 손으로 매일 무리한 연습을 해 그의 오른손은 부상과 통증에 자주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그는 오른손잡이지만 왼손 단련에 집중한다. 펀치력에 의존하지 않고 머리를 쓰는 아웃복서로 지구력을 키우고 각종 기술을 습득한다. 그런 피나는 노력이 있어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
“챔피언이 되었으니 행복했을 것 같죠? 챔피언이라는 꿈을 이루었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물론 영광도 있었죠. 전국민이 아는 대스타가 되었으니까. 청와대에 초청 받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상금을 받기도 했죠. 그러나 영광은 한순간입니다. 군인 일등병 때 챔피언이 된 것이 불운이었어요. 카퍼레이드까지 한 챔피언이 되니 군대 내에서도 이분 저분 찾는 사람이 많고 더욱 일상이 구속되더군요. 방어전을 치러야 하는데 여러 문제로 복싱에 대한 의욕을 잃을 정도였어요. 군인이라 트럭을 타고 부대 밖으로 훈련을 하러 나가야 했는데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챔피언이 되어도 그랬어요. 어린 마음에 괜히 챔피언이 되었나하며 의욕을 많이 잃었죠. 챔피언은 실력은 기본이고 실력을 발휘할 마음가짐과 환경도 중요합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생겨요. 나 스스로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해도 심판의 편파 판정이나 상대 선수의 계체량 속임수, 적절한 타이밍의 시합성사 실패 등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안됩니다. 인생이 그렇더군요.”  
그는 챔피언이었지만 최악의 컨디션으로 숙명의 라이벌 알폰소 사모라와 원정경기를 해야 했다. 그렇게 챔피언 벨트를 뺏기고 만다. 이후 절치부심하며 재기에 노력해 다시금 밴텀급 동양 챔피언의 자리에 세번째로 다시 오른다. 이런 과정을 거쳐 홍수환은 알폰소 사모라와 챔피언 타이틀전을 또 다시 가졌다. 집안의 전재산을 대전료로 지불하며 치른 경기라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그 경기에서 주심의 편파판정으로 허무하게 패배하고 만다. 

 

패배 인정하고 4전 5기 신화창조

 
그는 그 패배가 정말 억울하고 괴로웠다 한다. 제대로 된 경기결과가 아닌 심판의 편파판정에 가족이 격렬히 항의하다 난장판이 되어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집안의 전재산까지 걸며 최선의 노력을 다해 훈련했지만 패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것도 실력이 아닌 편파판정으로.
“괴롭지만 패배는 패배죠. 내가 사모라를 완전히 KO로 기절시켰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언론은 필요할 때는 띄워주지만 잔인할 때는 잔인합니다. 홍수환의 시대는 끝났다는 기사부터 나의 영어 실력을 비웃는 기사까지 다양하게 저를 난도질하더군요, 제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인기를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겠습니까? 저에게 복싱은 인생의 모든 것이었어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냉정하게 내 앞날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체급을 올려서 한 번 더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리라 결심하죠. 나는 나 자신을 한 번 더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 무렵 WBC에서 먼저 슈퍼밴텀급이 생겼고 WBA에서 나중에 같은 체중대로 주니어 페더급을 신설했어요. 그래서 다시금 몇 차례 예선전에 승리하고 파나마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와 주니어 페더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을 치를 수 있었죠. 남아메리카 파나마에서 열린 그 챔피언 결정전에서 누구도 내가 승리 할 것이라 예측하지 않았어요. 모두가 나의 패배를 예상했죠. 상관없었어요. 나는 주눅들지 않았어요. 카라스키야의 강한 주먹에 4번 다운되어도 투지는 잃지 않았어요.”
원래 복싱에서는 1라운드에 3번 다운되면 자동적으로 패배하게 된다. 그런데 카라스키야는 홍수환에게 먼저 무제한 다운제를 제안한다. 11전 11KO승을 자랑하던 카라스키야가 자신의 완전한 KO승리를 자신해서다. 그런 오만함이 오히려 홍수환에게 도움이 되었다. 결국 2회전에 4번 다운 당한 후 3회전에서 홍수환은 카라스키야를 완전한 KO로 눕혀 버린다. 

 

눈 앞의 목표를 강렬하게 갈구해야

 
홍수환이 파나마에서 보인 4전 5기 정신은 한국인의 의지를 가장 잘 표현한 스포츠 경기로 손꼽힌다. 당시 2회전 영상을 보면 카라스키야는 잔인할 정도로 그를 때리고 또 쓰러뜨린다. 4번이나 다운 당한 후 코너로 돌아온 뒤 어떤 생각이 들었냐고 물으니 오직 한 번의 기회가 오기만을 갈구했다 한다.
“경기를 보는 사람도 정신없는데 맞은 나는 제정신이 아니죠. 2회전 끝나고 코너에 돌아오니 매니저 코치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어요. 그때 코치님이 그러더라고요. 수환아 1회전만 더하고 끝내자. 마음이 아픈거죠. 2회에 4번 쓰러지고 공이 울릴 때까지 제가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리신 한국인들도 많다고 들었어요. 저도 후배 양성하지만 제가 키운 선수가 한 라운드에 4번 다운되면 그냥 타월 던져서 기권패 시킵니다. 보는 사람이 괴롭거든요. 선수의 생명도 중요하구요. 그런데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정말 왼손 레프트 한 방만 맞추고 싶었어요. 저 훈련했거든요. 정말 노력했는데 한 방만 제대로 맞추고 싶었어요. 4번째 일어나서 싸우겠다는 내 모습을 보고 카라스키야도 생각했겠죠. 이 게임은 판정으로 안가겠구나. KO말고는 답이 없다. 난 이미 2회에 두 눈이 부어서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어요. 주먹 한 방만 왼주먹 한방만 제대로 맞추기를 갈구했어요. 기적은 갈망이 있어야 해요. 그렇게 기적이 일어나는 겁니다.”
홍수환의 레프트훅을 맞은 카라스키야는 3회에서 무너진다. 짜릿한 역전승이었다. 한국 프로복싱 사상 첫 두체급 챔피언이 된 홍수환은 그렇게 국민 영웅, 한국 복서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그때의 승리는 눈 앞의 목표에 집중하고 투지를 잃지 않았기에 가질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챔피언의 공구는 오직 ‘배짱과 투지’

 
홍수환은 링보다 인생이 더 무섭다고 말 한다. 챔피언도 인생에 있어서 말 못할 위기가 많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챔피언으로 보고 챔피언처럼 살기를 바란다. 인간 홍수환으로 살아가며 당당하게 살아왔지만 억울한 오해와 시기를 받기도 또 풀기도 했다. 
“나는 손도 작고 체구도 작아요. 팔 길이도 짧은 편이죠. 권투선수로서 성공하기에는 애초부터 먼 조건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권투를 하겠다는 내 의지와 고집이 뚜렷해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었죠. 나의 스승인 김준호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주먹이 크다고 다 훌륭한 복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센 주먹은 스스로 길러야 한다. 연습에는 이길 장사가 없는 법이다. 이 말은 진리였습니다. 결점과 단점을 극복하며 실력을 갖추면 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도 배짱과 투지, 의지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링 위에서는 누구도 경기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챔피언이 링에서 가질 수 있는 공구는 오직 배짱과 투지뿐입니다. 마치 인생과 같죠.” 
그는 지금도 자신의 복싱장에 출근해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복싱이 다시 국민 스포츠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과 목표도 가지고 있다. 그는 50번의 복싱 경기를 하면서 언제나 최고의 상황에서만 시합 할 수 없었다. 때로는 적지에서, 때로는 최악의 컨디션으로 상대방과 싸워 이겨야 했다. 한국 최초의 두체급 세계챔피언 홍수환도 이제 칠순의 나이다. 그런 그가 공구인들에게 외친다. 버텨라. 싸워라. 이겨라. 파이팅!

 

글 _ 한상훈 / 사진 _ 이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