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CULTURE
무더위 속 1800℃와 싸운다. 경기 군포 방짜유기 전수교육관
무더위 속 1800℃와 싸운다
경기 군포 방짜유기 전수교육관
8월이 무덥다지만 뜨거운 용광로 옆 쇳물 옆보다 덥고 위험할까? 불길이 치솟고 재와 먼지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함께 녹인 후 수천 번의 망치질로 두드려 만드는 우리의 전통그릇이다. 경기도 군포에 위치한 방짜유기 전수교육관의 장인들은 쇳물보다 뜨거운 인생을 산다. 방짜 유기장인들과 그들의 공구를 만나 보았다.
국가대표급 사물놀이 악기 제작
경기도 군포의 방짜유기 전수교육관은 경기도 무형문화재 10호로 지정된 김문익 장인과 그 전수자 이춘복 조교의 활동으로 운영된다. 김문익 장인은 12살 소년 시절부터 방짜 공방에 입문해 지금까지 평생 방짜유기만 제작해 왔다. 그가 만든 징과 꽹과리는 국악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통한다. 그의 악기는 다른 악기보다 맑고 고운 소리를 낸다. 대표적으로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 사용된 바라가 그의 작품이다. 또한 평창 패럴림픽에도 그가 만든 징이 사용되었다. 세계를 무대로 우리나라 국악을 알리는 김덕수 사물놀이패도 그가 제작한 악기만 사용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면서 징과 꽹과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각종 행사에 필요로 하니까요. 그때는 만드는 족족 다 팔려 나갔는데 아마도 사람들 생활수준이 나아지면서 전통에 눈을 뜬 것이 방짜를 찾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방짜 방식으로 만든 징과 꽹과리는 기계로 찍어 만든 것과 큰 차이가 납니다. 소리울림이나 높낮이는 기계로 만든 것이 따라갈 수 없죠. 그래서 국악인 김덕수씨도 제가 만든 작품들 중 가장 좋은 것만 사용해요.”
방짜는 공정상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어 진다. 같은 날 만든 꽹과리도 소리나 모양이 똑같을 수 없다. 하지만 용도에 따라 찾는 소리가 다르다 한다. 방짜로 만들어진 제품은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사용자를 운명처럼 찾아간다. 드라이버가 가정용, 산업용으로 나누어지고 손님의 사용처에 맞게 팔려가는 것과 같다.
뜨거운 열 속에서 쇳물 붓고 두드려
우리나라에서 유기로 유명한 곳은 평안도 정주 납청, 경기도 안성, 경상도 김천과 함양, 전라도 순천 등이다. 유기는 지역마다 만드는 방식이 다른데 정주, 김천, 함양은 방짜. 안성은 주물로 제작되며 순천은 방짜와 주물 중간인 반방짜 방식으로 제작된다. 방짜는 망치자국이 은은하게 남아 있어 수공예품의 멋이 가득한 것이 특징이다.
“방짜 그릇이나 악기를 만들려면 먼저 쇳물을 만드는데 구리와 주석의 합금 비율을 72와 28퍼센트로 정확하게 맞춰야 합니다. 쇳물을 부어서 두드리기 좋게 원형 놋쇠판으로 만드는 것을 바둑돌 작업이라고 하죠. 그런 놋쇠를 과거에는 6명이 한조가 되어 불에 달구고 두드려 견고하게 만들었어요. 이런 방짜의 특성상 악기의 경우 내가 봐도 잘 나왔다 싶은 그런 작품은 1년에 몇 개 건지지 못해요. 그런 악기는 부르는게 값 입니다.”
방짜를 만드는 과정은 모두가 위험하지만 특히 위험하고 조심해야 하는 날이 바로 쇳물을 붓는 날이다. 붉은 쇳물이 틀 안에 부어지면 곧바로 톱밥이 던져진다. 불꽃이 허리 높이까지 올라오고 재와 연기와 더불어 뜨거운 열기가 실내를 가득 채운다. 작은 실수도 용납 못하는 위험하고도 섬세한 작업이 여름의 뜨거움 속에서 펼쳐진다.
망치질 한 번에 달라지는 방짜
1950년대 악기와 지금의 악기는 소리가 다르다. 음향 설비가 없었던 과거에는 소리가 가급적 크고 멀리 퍼져나가는 것이 좋은 악기였다. 반면 요즘 만드는 징과 꽹과리는 현시대의 악기 및 음향 설비와 호흡을 맞춰야 한다. 기존보다 잡음이 없고 부드러운 소리가 선호 되는 이유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같은 악기지만 사물놀이용과 무속용 소리가 다릅니다. 아무래도 사물놀이용 악기는 산뜻합니다. 반면 무속용은 요란한 느낌이 나요. 또 무속용이라고 해도 산에서 사용하는 것과 배에서 사용하는 것이 달라요. 게다가 지역에 따라 선호되는 소리가 또 달라요. 그래서 악기 주문을 받으면 합금할 때부터 금과 은의 배율을 다르게 하고 원하는 소리를 찾아 제작해야 합니다. 같은 비율로 같은 날 쇳물을 부어 만든 제품도 망치질 정도에 따라 소리가 달라져요. 소리를 잡아가는 것이 기술입니다.”
군포 방짜유기 전수 교육관에서 제작하는 제품들 중 사찰에서 사용하는 불기가 60%, 가정 반상기와 사물놀이 악기가 각각 20%로 제작된다. 최근에는 가정 반상기의 인기가 높다. 사람들이 건강에 좋다는 유기로 그릇을 바꾸고 있다. 전통 한정식 집에서도 유기를 찾고 혼수로도 방짜유기 그릇이 인기다.
밀려나던 방짜유기 이제는 각광 받아
김문익 장인의 고향은 경남 함양이다. 이 지역은 방짜 유기, 그 중에서 꽹과리와 징, 바라 등 악기 제작으로 유명했다. 1960년대 이전만 해도 사람들은 유기그릇을 선호해 유기 장인의 돈 벌이는 좋았다.
“1950년대 처음 이 일을 할 때 하루 일하면 식구들 한 달 먹일 수 있었어요. 유기장집의 개는 쌀밥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었으니까. 보수가 그만큼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시작했죠. 기술을 배우는 것도 힘들었어요. 저는 고모부가 유기업에 종사했기에 어린 나이에도 기술을 배울 수 있었죠. 그런데 1960년대가 되니 연탄난방이 도입되면서 유기가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연탄가스에 노출되면 유기그릇이 변색 되니까요. 허나 포기하지 않으면 다시금 기회는 옵니다. 1980년대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계기로 국악 붐이 일어나고 유기가 건강에 좋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지금은 방짜가 큰 선호를 받고 있지요.”
김문익 장인은 13살 때부터 공방 생활을 시작해 기술을 익혀 1982년 경기도 군포에 ‘국일공예사’를 설립한다. 저렴한 중국산 유기가 들어오자 제조공법에 자동화를 도입해 적은 인원으로도 100여종의 다양한 유기제품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현재 그의 곁에는 이춘복 전수조교가 있다. 이 조교 역시 40년째 방짜 제작 외길 인생을 걷고 있다. 이춘복 전수조교는 김문익 장인의 조카로 1998년 전수조교로 낙점 받은 이후 현재 방짜 제작의 중요 공정 대부분을 주도 한다.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고 뛰어넘는 세상이다. 하지만 사람만 할 수 있는 전통의 가치는 기계가 따라 올 수 없다. 김문익 장인과 이춘복 전수조교의 대를 잇는 망치질은 방짜를 만드는 수공구처럼 계속 이어진다.
글 _ 한상훈 / 사진 _ popcon(팝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