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CULTURE
[TRAVEL] 독일 렘샤이트 공구박물관
2012년 툴지 특집편에 실린 독일 렘샤이트 공구박물관. 세계 몇 안 되는 공구전문 박물관이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쉽지 않은 시기여서 비대면으로 체험해보시라고 일부 재구성해 다시 게재한다. 현재 상황을 파악해본 결과 문을 열어두고 있으며, 코로나로 관람객 수가 줄었다는 독일언론 보도에 나올 만큼 작지만 유명한 곳. 툴 독자와 공구인들께 소중한 지면이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쾰른시내에서 기차로 1시간~1시간 반 가량 타고 부퍼탈(Wuppertal)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렘샤이트를 찾아가면 된다. 초행이라 길을 몰라 버스를 타고가면 약 3시간이 소요된다. 실제로 가보면 버스 노선 한 대만이 다니는 시골 중의 시골. 독일 사람들도 이곳에 공구박물관이 있는지 잘 모를 정도로 상당히 외진 곳이다. 우리나라 수많은 블로그에는 세계 어디 안간 곳이 없는데, 이 렘샤이트 공구박물관을 가본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공구업을 한다면 기어이 찾아갈만한 곳이다.
박물관은 1967년 만들어졌다. 박물관이 있는 렘샤이트(Remscheid)는 라인강 하류 베르기세스란트(Bergisches Land) 지역의 심장부에 위치하며 부퍼강을 끼고 있다. 오래전부터 방적, 철물, 수공업 등이 발달해 독일공구의 중심지로 불린다. 15세기부터 일대에서 나오는 철광석과 목탄을 이용하여 철물과 수공업이 발달했으며 이후 기계 섬유 공업 등이 활발히 일어났다. 예전부터 독일의 유명 공구 제조사들이 30분 거리인 부퍼탈에서 많이 입지해 있었고, 이곳 렘샤이트에는 무역상이 많이 왕래했다고 한다. 즉 공구제조는 부퍼탈, 공구유통은 렘샤이트였다. 렘샤이트가 독일의 공구중심지이자 산업혁명기에 번영을 누린 점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알리기 위해 이 박물관을 열어두고 있다고 한다. 정식 명칭은 독일 렘샤이트 공구박물관(Deutsches Werkzeugmuseum). 석기시대 공구의 원형부터 공구무역이 시작됐던 18세기 유럽의 공구, 산업혁명 전후의 공구 등을 전시하고 있는데, 단순한 공구의 나열이 아니라 기술적, 역사적, 문화적 관점으로 공구를 조명하고 있어 그 가치가 더 크다.
이 렘샤이트 공구박물관은 근방의 클레프 하우스(아마도 공구무역상으로 추측되는 이의 집)에서 소장품들을 옮겨오면서 건립이 시작됐다. 18~19세기 부자들의 주거형태를 잘 말해주는 가옥을 리모델링한 것인데, 박물관이 일반 살림집처럼 생겨 독일인의 주거문화와 공구문화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박물관에는 수공구부터 톱, 드릴, 밀링 등의 절단 공구, 누르거나 성형하는데 필요한 프레스 관련 공구, 운반과 고정에 필요한 클램핑 공구, 최근의 전동공구 등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다. 18~19세기 당시의 작업환경과 공장시설 등도 함께 보여주고 있어 공구가 시대와 기술발달에 따라 어떻게 변모하는지 설명한다. 특히 이곳 렘샤이트가 석탄과 광물, 철물이 많이 나던 곳이라 탄광시설과 운반 모습도 함께 보여준다. 1906년 철강기술자 리차드 리든버그가 사용했던 최초의 용광로도 있어 눈길을 끈다.
공구는 증기기관차의 발달과 관련이 깊다. 박물관에도 증기기관차 일부가 통째 들어와 있다. 공구를 만드는 기술이 정밀해지자 결국 증기기관차의 성능도 발전했다. 또한 성능이 좋아진 증기기관차는 공구의 대량생산과 유통을 가능하게 했다. 1868년 공구생산이 늘자 렘샤이트에 철도가 생겨났다는 기록이 있다. 증기기관에는 보일러가 필수적이라 보일러 기술도 함께 발달했다. 보일러 기술에 공구가 들어감은 당연한 원리. 이런 시설 자체도 박물관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렘샤이트에서 공구제조뿐만 아니라 공구유통이 발달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자연환경적으로 철물이 많이 생산돼 원료도 풍부했고, 또 강을 끼고 있어 수송에도 수월했다. 여기에 렘샤이트 출신의 걸출한 상업인이 탄생한 영향도 컸다. 18세기 후반 페터 하젠클레버(Peter Hasenclever)는 어린시절부터 대장간에서 견습공을 거친 인물. 13세에 비즈니스 교육에 입문해 이후 19세 때 독일 대표로 프랑스와 스페인 등 해외 무역 견학을 가게 됐다. 이후 1764년경 많은 제철소를 설립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상공회의소’를 창립했다. 그는 해외수출과 경험을 가지고 고향인 렘샤이트를 방문해 후진양성에 힘을 썼다고 전해진다.
독일의 공구산업 특징 중 하나는 한국처럼 농업과 공업이 분리되지 않고 농사짓는 마을 한 편에 공구공장이 있어 마을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공구산업을 키웠다는 점이다. 18세기 중반부터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독일은 인구과잉현상을 겪었고 이렇게 남는 노동력은 공구생산에 요긴하게 사용됐다. 결국 인구대이동이 일어났고 19세기 중반 경제구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렘샤이트를 비롯해서 부퍼탈, 에슬링엔 등 독일의 서부와 북부에서는 강철제품 공장, 공구공장이 많이 들어섰으며 특히 프리드리히 딕(Fridrich Dick)이라는 큰 줄 공장이 생겨났다.
공구산업은 1890년대 이후로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이런 성장의 원인으로는 기계제작과 정밀공구 기술이 함께 발전한 덕분이고 또 많은 회사들이 특허권에 일치감치 눈을 떠 일찍 독점권을 누렸기 때문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공구산업은 더할 나위 없이 호황을 누렸다. 전쟁 후 복구에 공구물자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돈을 벌게 되니 자연스레 기술연구에 투자하게 됐고, 더불어 최고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게 됐다. 공기압축, 구동장치, 측량공구, 기계공구, 드릴, 밀링 공구 등이 독일산업의 최강 대표선수로 나서게 됐고, 이런 현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1961년, 독일의 공구생산에 변화가 왔다. 생산지를 이탈리아 브라질 프랑스 등으로 이동하는 등 제조공장을 해외로 넓혀갔다. 그러나 행정과 연구개발 부서는 독일 본사에 두는 방식을 택했다. 독일에서 기계제작과 금속가공으로 유명한 에슬링엔이라는 도시는 1994년에 이미 2만 7천명의 고용을 창출했고 약 670억 마르크 매출을 올렸다. 그 중 수출이 37%를 차지했다.
망치, 끌, 천공도구, 줄, 연마 도구, 톱, 파이프, 설비, 드라이버, 스패너 등을 생산할 때 그 생산품질의 향상에만 혼자 골몰하지 않고 이 공구를 사용하는 회사들과 사용현장에서 어떤 기능들이 필요한지 꾸준히 연구하고 피드백을 받았다. 이것이 독일공구의 우수성을 이끄는 중요한 비법이 되었다. 결국 사용자의 손에 맞고 작업환경에 더 적합한 공구, 다시 말해 오늘날의 인체공학적이고 안전한 제품생산의 토대가 되었다. 렘샤이트 박물관에 가면 그 고민의 흔적처럼 남아있는 각종 공구설계도를 볼 수 있다.
1994년 통계에 따르면 렘샤이트에는 약 300여개의 제조사가 있었으며 공구기술자들이 경제적으로 중산층을 형성했다. 이들 기술자들은 레이저 기술, 코팅 기술, 자동화 기술 등을 가졌고 나중에 최고수준의 생산설비를 위한 기술적 토대가 되었다.
독일 공구역사에서 카탈로그 편찬은 빼놓을 수 없는 일대 전환이었다. 현재 한국에서 공구카탈로그를 만들어 내는 데가 크레텍을 비롯해 몇 군데 있고, 그 전에는 미국과 일본의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번 취재에서 독일도 카탈로그 편찬을 공구유통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새삼 놀랐다.
렘샤이트 박물관 관장인 디드리히 박사(Dr. Urs Diederchs)는 “컴퓨터 시대를 맞아 인쇄편찬 기술의 발달은 공구산업을 크게 바꿔놓았다”고 설명했다. “가격, 인도조건, 사용범위, 공구종류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모아서 전달할 수 있고, 생산자와 무역자가 동등하게 합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고 전했다.
유럽재정위기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기계제조산업은 14% 성장을 했고 특히 공구제품은 1/3가량 생산이 증가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전체적으로 독일의 경제성장율은 둔화되자만 경제전반은 안정적인 모습이라는 평가다. 독일정보기술미디어협회(Bitkom)와 독일연방통계청 등은 이런 내부적 경제안정의 원인을 오래도록 다져진 공구기계 산업의 탄탄한 기술력과 유통망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더불어 기술력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적 기록을 바로 렘샤이트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렘샤이트로 가는 길은 멀었다. 쾰른 시내를 벗어나면 간단한 영어조차 통하지 않는다. 길을 몰라 버스기사에게 물었더니 무서운 회색눈동자로 쏘아봤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승객들 앞에 나가 안내양처럼 소리쳤다. “영어 하는 사람 없어요?” 버스 안은 조용했고, 이때 머리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이고 화장을 진하게 한 중학생 소녀가 손을 들었다. 흡사 농땡이 치고 학교를 안간 아이로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눈빛은 순했다. 세상에 모든 이는 아름답다. 피어싱을 잔뜩한 이 순둥이 십대소녀는 짧은 영어로 내릴 곳을 알려줬다. 그 길에서 내게 구세주였기 때문에 지금도 그 소녀가 못내 보고 싶다. 마을길에 들어서자 한 아이엄마는 ‘이런 빌어먹을 내 영어실력’이라며 손으로, 글로 길을 가르쳐 줬다. 드디어 박물관에 들어섰다. 독일어만 할 줄 아는 할머니 가이드와 그 손녀딸이 있어 한 번 더 망연자실해야 했다. 그들 역시 말이 아닌 온몸으로 내게 이 마을의 이야기와 박물관 유물들을 설명해줬다.
공구는 도구이다. 공구가 만들어지는 역사의 현장에 언제나 사람이 있어 공구에 깃든 사람의 정성과 노력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처음 가 본 독일. 독일의 봄길에서 만난 버스 아저씨, 할머니, 날라리 십대, 검소한 외투를 입은 아기엄마에게 멀리서나마 안부를 전한다.
글·사진 _ 서상희 TOOL 편집장
박물관 내부 영상
코로나 이후 공구박물관 상황(39초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