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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CULTURE

폐암도 못 막은 공구사랑, 박용국 조각가


폐암도 못막은 공구사랑
 
스테인리스 조각가 박용국



수천 가지 공구 가득한 작업 공간
 
금속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의 작업실은 이곳저곳 만들고 있는, 이미 만들어진 작품들로 가득했다. 철을 조각하기 위한 공구들도 거대한 선반 구석구석 펼쳐져있었다. 망치, 니퍼 등 수공구부터 드릴, 탭 등 절삭공구, 전동·에어공구, 용접기, 목공구까지 그 수도 종류도 다양했다. 재료를 깎고, 다듬고, 붙이고, 구부리고, 틀을 잡는 데 사용하는 도구들이다. 
“20년 전 공구가방 4개로 시작한 짐이 지금은 컨테이너 몇 십 채 분량이 됐네요.”
개인이 가지고 있다하기엔 너무나 많은 공구들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찰나였다. 매 다른 작품들을 공들여 만드는 과정만큼 다양한 공구들이 쓰이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새로운 공구를 샀다며 전동드릴을 하나 꺼내들었다.
“집에서 이 작업실까지 오는 길에 공구단지들을 항상 지나가야 해요. 참새가 방앗간 앞을 못 지나간다고, 제가 꼭 그래요. 어제도 지나가다 드릴 하나를 구매했어요. 수원공구단지를 주로 많이 가는데 필요한 게 있어서 가기도 하지만 충동구매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무거운 철을 들어 옮기기 위한 거대한 호이스트도 작업실 천장에 달려있었다. 직접 작동을 시켜보였다. 이 호이스트부터 작은 못까지 그가 가진 공구만 해도 수천 가지가 된다는 말에, 공구상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수많은 공구들로 스테인리스를 자르고 다듬을 때는 분진과 소음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가 거주하고 있는 수원지역에는 큰 작업실을 열 수가 없어 10년 전, 30분 거리의 화성 산골에 들어오게 됐다고 했다. 자연 속에서 현대적인 쇠를 다루는 것이라니, 목재로 지어진 작업실과 그 옆 컨테이너 전시실 또한 조금은 어색한 듯 서로 특별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강하고 오래가는 스테인리스, 다루기도 어려워
 
“금속은 참 매력적인 소재예요.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그만큼 가치성을 발휘해주고, 희열도 생겨요. 연마를 하면 할수록 빛을 내는 것처럼 말이에요.”
조각을 전공한 고등학교 미술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조각가의 꿈을 키운 그는 홍대 조소과에 진학했다. 대학 3학년 때 철조 수업을 들으면서 철이라는 소재를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철을 다루고 공부하면서 그는 금속이 적성에 딱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개인 전시회를 준비하면서는 금속 중에서도 스테인리스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20년 동안 스테인리스를 주로 다뤄왔어요. 스테인리스는 일반 철처럼 산화되거나 부식되지도 않고, 환경에 영향을 잘 받지 않아 오래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요. 조금 비싸긴 하지만 강도가 세고 현대적인 이미지를 주기 때문에 작품에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스테인리스는 일반 철보다 강도가 세다. 머릿속에 떠올린 작품을 그대로 구현해내기 위해서는 재료를 자유롭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이 방법에 대한 노하우를 20년간 습득해왔다. 스테인리스를 자르기 위해서는 직접 그라인더를 사용하거나, 레이저커팅 등 기계로 작업을 한다. 정밀함이 필요할 때는 밀링작업을 할 때도 있다. 붙일 때는 용접을 하거나, 탭 또는 구멍을 뚫어 리벳팅 하는 법, 입체적으로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는 조각조각 나눠 자르고 부풀려 형압하거나, 재료를 용광로에 녹여 주물로 작업하는 것 등 수십 가지의 방법을 때에 맞게 활용한다. 마지막으로 형상 작업을 마친 작품은 표면이 거칠기 때문에 광을 내기 위한 연마 과정을 거친다. 스테인리스가 반질반질해지고, 거울처럼 투영돼 광을 내는 것은 이 연마 과정이 있어서다.
그가 제일 많이 쓰는 공구는 그라인더와 핸드밀러다. 규격, 용도에 따라 여러 제품을 구분해 두고 있다. 작업실 가득 공구들이 널브러져 있지만 필요한 것은 언제든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이 그의 특기. 마치 공구상 사장님처럼 어떤 물건의 위치도 그의 머릿속에 저장돼 있었다.
 
오랜 작업에 건강 악화… 폐암 이겨낸 새 삶
 
조각을 할 때는 작품에만 몰두하다보니 몸을 챙기지 못할 때가 많다. 밤샘 작업으로 잠이 부족하거나, 공구로 인해 다친 적도 많다. 그의 손과 팔, 다리는 잔 상처가 가득했다.
“공구는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사람을 해치기도 해요. 내가 공구를 이기고 있지 않으면 언제든 다칠 위험이 있어요. 항상 통제 가능한 상황이어야 하죠.”
많은 조각가들은 안전장비 없이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그 역시 쇠를 갈거나 용접을 할 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작업을 하는 일이 잦다보니 위험물질이 몸으로 흡수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20년 이상 유독물질과 분진에 노출돼있던 폐에 결국 무리가 갔고, 그는 3년 전 급성폐암을 맞았다. 수술이 불가능해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처음 죽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머리가 하얘지고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어요. 치료 방법을 찾기 위해 온 지인을 동원해 다른 병원을 알아봤죠. 한 병원에서 의사가 한 번 싸워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담배도 술도 끊고 항암치료와 더불어 철저하게 건강관리를 했어요. 모든 걸 내려놓고 치료에만 집중했더니 다행히 지금은 암이 완벽하게 없어졌어요. 그때부터 제2의 삶을 살게 됐죠. 지금은 작업할 때 안전장비를 무조건 착용하고, 어떤 일에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 해요.”
한 차례 큰 아픔을 겪어서인지 그는 예전의 악착같은 마음을 버리고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혈색도 좋아졌다. 후학 양성을 위한 대학 강의와 더불어 신인 작가를 선정해 무료로 작업 공간, 전시실 대여 등 베품도 조금씩 실천하고 있다. 틈틈이 텃밭도 가꾸고 더욱 차분해진 마음으로 작품 활동을 즐긴다며 활짝 웃는다.



스테인리스의 끝없는 진화… 시작은 알에서부터

최근 개인전을 통해 전시한 그의 작품은 알에서 둥지까지 다양하다. 생명의 ‘순환적 진화’를 주제로, 생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알에서 출발해 시공간을 순환하는 진화의 가능성을 표현했다. 그는 조상인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에서 떠올린 아이디어이기도 하다며, 작품을 꺼내들었다. 스테인리스의 단단함과 묵직함이 그 속에 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게 했다. 전시작품 중 물에 뜨는 스테인리스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낚시 추의 원리를 떠올리고, 금속 화석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실제 죽은 동물이나 곤충을 채집하기도 했다. 주변의 사물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습관이 끊임없는 작품으로 탄생된 것이다. 이 중에서도 그가 애착을 갖고 있는 것은 실제 레고처럼 블록을 뺐다 끼우면서 다양한 모형을 만들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일반 레고는 플라스틱 재질이라 가볍고 크기가 정확하지 않아도 약간 늘어나면서 끼워 맞춰지는 게 있는데, 금속은 늘어나지 않기 때문에 정밀하게 제작해야 해요. 어느 방향에서나 맞춰지기 위해서는 공차를 최소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공을 많이 들였던 작품이에요. 이 블록작품은 제가 상을 받을 수 있게 된 계기도 됐습니다. 가로 6cm, 세로 3cm로 블록 제작을 시작했는데, 점차 확대해 지금은 1m x 2m까지 제작을 했어요. 더 크게 만드는 것을 성공하면, 이 작품과 순환적 진화에 대한 의미를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그는 앞으로 이 작품을 확대 제작해 전 세계 레고 지사에 전시하는 등 큰 프로젝트로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작업실로 다시 눈을 돌렸다. 웬만한 제조공장 못지않은 이곳에서 막 연마작업을 마치고 나온 매끈한 알 하나. 그것은 또 다른 탄생을 의미하듯 고유의 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글 _ 장여진·사진 _ 박성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