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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CULTURE

공구인 윤주훈 히말라야 칼라파타라에 오르다


직장생활 30년차 공구인 윤주훈
 
히말라야 칼라파타라에 오르다
                          (5,550m)




 

등산을 하며 꿈꾸던 히말라야

산악인들은 극한 고통을 감수하고 죽음을 무릅쓰면서 정상에 도전한다. 산을 오르면 자연을 보고 동시에 자기자신을 뒤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극한의 상황을 이겨내며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 개인이 얻는 성취감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굳이 높은 산이 아니어도 좋다. 그 누구도 인정을 하지 않는 등산이라도 본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등산이라면 그것 자체로도 소중한 경험과 자부심으로 남게 된다. 
나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산행을 시작했다. 오직 건강을 되찾고 싶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것이 산행이었다. 17년 전 당시의 나는 끝없는 추락을 겪었다. 희망을 가지고 시작한 사업은 실패를 했고 뒤이어 찾아온 교통사고로 온몸에 골절상을 입게 되었다. 병원에서만 1년하고도 6개월을 반신불수로 보냈다. 5층 병원 계단을 오르는 것조차 힘겨워 두 팔을 쓰며 기다시피 올라갈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 어느 정도 몸을 추스리고 많은 사람의 배려로 크레텍에 입사했다.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공구인들과 함께하며 나는 다쳤던 몸과 마음이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남은 인생은 꼭 건강한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  후배이자 산악인 ‘박무택’의 권유로 등산을 시작했다. 처음 올라간 산은 아무런 말없이 나를 보듬어 주었다. 대구 팔공산을 오르기 시작해 전국의 높은 산을 오르고 백두대간과 백두산을 오르면서 건강을 되찾았다. 하지만 내가 히말라야를 오르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도 어느 산악인처럼 언젠가는 히말라야를 등반하겠다는 꿈을 꾸게되었다. 

 
마침내 네팔 ‘카트만두’로 출격
3월 20일 대한민국, 인천 → 네팔, 카트만두(1,281m) 
 
바쁜 직장생활 속에서도 건강과 나 자신을 위해 주말마다 등산을 했다. 그러나 히말라야 등반은 은퇴 이후의 꿈으로 남겨두었다. 국내의 산이 아닌 외국의 5,000미터가 넘는 고봉을 오르는 것은 많은 준비를 필요로 한다. 지난 10년간 꿈만 꾸던 히말라야가 진짜 현실이 된 것은 내가 속한 ‘한국 알프스 산악회’의 지인들이 히말라야 등반을 논의하면서 부터였다. 정옥열, 오세훈, 우재민, 송준호 산악회 회원 네 사람이 내게 히말라야 칼라파타야 봉을 함께 등반하자는 권유를 했다. 과연 내가 히말라야를 오를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더불어 가족과 직장을 걱정했지만 일정에 맞추어 한국을 떠나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8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나는 앞으로의 일정과 각오를 되새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네팔의 수도 카드만두에 도착을 했다는 기내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카트만두에 내리자 카드만두 공항의 열악한 시설에 놀라고 세계 각국에서 시즌 트레킹을 위해 입국하는 여행자의 인구에 놀랐다. 한국인은 우리 일행 5명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서둘러 카드만두에서 미리 예약한 호텔에서 하루 밤을 보내며 여독을 풀었다. 네팔의 수도로 네팔에서 가장 큰 도시인 카트만두의 날씨는 한국의 초여름처럼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카드만두는 해발 고도 1,281m에 위치해 있다. 우리나라에서 1,281m면 상당히 높은 산이다. 참고로 강원도 치악산의 높이가 1,288m다. 강원도 치악산 정상 높이에 수도가 있는 네팔이 진정 고산지대에 위치한 나라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히말라야의 시작 ‘루클라’로 이동
3월 21일 루클라(Lukla 2,840m)→팍딩(Phakding 2,610m)
 
호텔을 나선 우리 일행은 다시 카트만두 공항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루클라(Lukla, 2,840m)지역으로 이동을 했다. 우리가 이용한 16인승 경비행기는 참 작고 기류에 흔들리는 일이 많았다. 작은 창으로 보이는 산악지대를 보니 아찔하다. 마치 곡예비행을 하는 것만 같다. 인천에서 카드만두로 오는 8시간 비행보다 카트만두에서 루클라로 이동한 이 1시간의 비행이 더욱 피곤하게 느껴졌다. 가이드는 우리가 이용하는 루클라 공항이 세계에서 가장 짧은 활주로라고 한다. 루클라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공항에 있는 경찰서에 방문해 입산 신고를 했다. 그리고 공항의 커피숍에서 가이드와 셀파를 만났다. 비행기 멀미와 갑작스런 고도의 상승으로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웠다. 지금부터 고산증세가 찾아온 것이 아닌가 걱정을 했다. 고산증세는 어쩔 수 없다. 해발 2,744m의 백두산 천지 근처쯤 올라가면 본격적인 고산병 지대니 해발 2,840m 루클라 지역에서 고산증세를 느끼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차 한잔을 하며 잠깐 휴식을 취한 후 루클라지역에서 팍딩(Phakding 2,610m)으로 이동을 한다. 이때부터 자동차나 오토바이와 같은 이동수단을 만나기가 힘들어진다. 사람이 짐을 짊어 지거나 당나귀가 짐을 짊어진다. 우리도 배낭을 매고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첫 숙영지는 팍딩에 있다. 200미터를 하산하는 내리막길을 4시간에 걸쳐 걸었다. 초여름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나는 지금 네팔 히말라야를 등산하고 있다는 기분을 만끽했다. 

 
말보다 사람이 짐을 더 짊어져 
3월 22일 팍딩(Phakding 2,610m) → 몬조(Monjo 2,835m)
 
팍딩에서 하루밤을 지내고 우리는 8시간을 걸쳐 몬조를 향해 걸어나갔다. 완만한 오르막 길이다. 아직은 오를만 하다. 하지만 최고의 복병인 고소적응을 위하여 대원들에게 70%의 에너지만 사용하고 물을 하루에 3리터를 마시게 했다. 과욕은 없애고 전체 팀웍을 강조하며 진행한다. 히말라야는 전부 낯선 환경이다. 음식, 잠자리, 물, 화장실 등 오지에서의 살아 갈 방도를 책과 인터넷 경험자를 통하여 섭렵하였으나 실제 내가 직접 와서 본 환경은 열악하다. 이곳의 이동 수단은 헬기와 사람, 당나귀, 소, 말, 야크다. 그 중 야크만 해발 5,000m 이상 살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이 헬기를 제외하고 제일 무거운 짐을 운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도로가 원체 엉망이기에 그렇다. 차라리 사람이 짊어지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곳의 물가는 한국 물가와 거의 비슷하다. 계곡에 흐르는 빙하수는 석회수여서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물고기 요리는 먹지도 보지도 못 했다. 닭은 해발 3,000m 미만에 사는데 크기가 중닭만하다. 고기도 별로 없고 뼈다귀만 많은 느낌이다. 고소를 이기는 방법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야 한다. 

 
‘남체’에서 만난 고산병 
3월 23일 몬조(Monjo 2,835m) →  남체(Namche 3,440m)
 
몬조에서 하루밤을 잔 우리는 본격적인 고도를 올린다. 해발 3,440m 남체를 향하는 첫 발을 내딛는다. 남체는 히말라야 최고의 고도에 있는 큰 마을이다. 모든 등반가들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고소증상을 체험한다. 그렇기에 우리도 이틀을 대기하며 훈련을 한다. 남체에서 고소적응을 위해 이틀 간 해발 3,800미터의  Everest View에도 오르고 몸을 더 높은 고지에 적응 시킨다. 남체는 루크라부터 매일 8시간~ 10시간의 산행으로 고도를 올리며 첫 3,000m대의 첫 관문을 통과하는 곳이다. 이곳부터 고소적응이 안되어 하산하는 사례가 발생한다. 실제로 남체를 오르기란 매우 힘들었다. 대원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자주 나타나더니 협곡을 지나 힐러리 다리를 건넜다. 산행 중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다. 우선 셀파, 그리고 운송 수단인 말, 소 당나귀, 야크를 우선한다. 워낙 많은 야크와 소가 다녀서 그런지 온통 길 바닥이 똥 천지다. 그래도 그 똥도 말려서 연료로 쓴다니 쓸모가 있다. 이곳의 기후는 공기는 맑으나 건조하다. 그리고 워낙 자외선이 강하여 썬크림을 아무리 발라도 얼굴이 탄다. 그래서 현지인 특히 셀파는 까맣다. 여인네들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물이 귀하여 빨래하는 것을 보면 처량하다. 사는 모습은 우리나라 1950~60년대 수준. 척박한 땅에 채소도 엉성하고 작은 감자를 심고 살아가는 수준이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남체는 상가도 있는 작은 도시 수준이다. 장날도 있어 각 골짜기 부족들이 3~4시간 걸어서 이동하여 이곳에 도착해 특산물을 팔고 있다. 

 
두통과 불면의 밤
3월 25일 남체(Namche 3,440m) → 텡보체(Tengboche 3,860m)
 
고산병은 고지대로 올라가면 점차 공기 중 산소농도가 떨어져 혈액 속의 산소가 줄고 저산소증이 발생하는 병이다. 순응력은 사람마다 다르며 저산소의 강도나 등산속도 고지대에서의 신체활동량 등의 다양한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고 튼튼한 사람이라고 덜 걸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기초대사량이 더 많아 일반인들보다 고산병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 우리도 몬조에서 남체를 지나면서 하나 둘 씩 밤마다 두통과 식욕부진, 그리고 불면이 찾아왔다. 계속된 등산으로 몸이 피곤한데 숨 쉬기가 괴로워 쪽잠을 잘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날이 밝자마자 텡보체에 오르기로 한다. 남체에서부터 찾아온 고산병 증상으로 온 몸이 무겁다. 물을 많이 마시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산을 오른다. 그러나 텡보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다들 지쳐 아무 말을 못하고 있다. 하루를 쉬고 내일 딩보체를 오르기로 한다.  

 
풀과 나무가 없는 딩보체
3월 26일 텡보체(Tengboche 3,860m) → 딩보체(Dingboche 4,410m)

딩보체는 해발 4,410m에 위치해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오르기 힘든 산이다. 딩보체로 향하는 길에 박정헌의 끈이라는 실화소설에 등장하는 촐라체(6,335m)가 앞에 있다. 후배와 등정 후 하산길에 크레바스에 빠진 후배를 위하여 자일을 끊지 않고 48시간을 견디며 함께 살아난 멋진 등반가가 우리나라에 있다. 보는 순간 전율이 느껴진다. 해발 4,000m를 넘어서자 식물도 작은 황무지요 너덜지대이다. 먼지가 풀풀나고 햇볕은 따갑다, 대원들 얼굴이 전부 까맣게 변해간다. 오늘은 걸음마져 무겁다 역시 높은 산을 걷는 것이 힘이 든다. 오늘 고비를 넘으면  큰 산을 넘는 것이다. 대원들도 심리적 변화가 조금 보인다. 여러 환경적 요건이 인간을 갈등으로 몰아간다. 컨디션이 좋은 사람은 서둘러 일정을 줄이자 하고 컨디션이 안 좋은 대원은  눈치를 살피는 신경전이다. 고산병 증세가 심해지면서 서로의 몸 상태에 따라 서로가 날카로워진다. 대원들을 다독인다. 일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급할수록 천천히 가라는 말이 있다. 과욕은 없애고 우리의 목표 달성을 위하여 서로서로를 모두 배려 한다.

 
고통스러운 걸음을 내딛다
3월 27일 딩보체(Dingboche 4,410m) → 로부체(Lobuche 4,910m)
3월 28일 로부체(Lobuche 4,910m) → 고락셉(Gorakshep 5,140m) 
 
딩보체에서 로부체로 도착하고 하루밤을 자는데 간밤에 눈이 내렸다. 밤사이 기압의 변화로 나를 비롯해 대원 모두가 몸이 힘들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침이 되자 고소증상 중 하나인 코피가 쏟아지고 화장실도 갈 힘이 없다. 대원들의 얼굴을 보니 모두가 부어 오른 상태다. 아침을 야크 우유와 감자와 계란 삶은 것으로 대체 한다. 몸이 힘들고 피곤해 입맛이 통 없다. 그러나 억지로 먹는다. 물도 오늘부터 1인당 4리터 이상 마시고 몸의 보온도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 조금 걸으니 해가 나고 몸이 조금 회복된다. 힘들 때마다 국내에서 마라톤과 대간을 할 때 어려웠던 구간을 지난 것을 되새기며 참고 이겨냈다. 고락셉 마지막 숙영지에 도착해 29일 새벽에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Everest Base Camp 5,364m)와 칼라파타라 (Kala patthar 5,550)를 등반하기로 한다. 긴 일정에 대원들이 심신이 지쳐있다. 만약을 위해 팀을 
2개조로 나눈다. 함께한 다른 대원들은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를 지나 칼라파타라로 등정하기로 한다. 반면 나는 셀파 
1명과 바로 칼라파타하라를 오르기로 했다. 하루 일정을 앞당기는 어려운 결정이다. 

 
칼라파타라 정상에 서다
3월 29일 고락셉(Gorakshep 5,140m) → 칼라파타라(Kala patthar 5,550m)
 
이른 새벽 셀파와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칼라파타라의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히말라야의 산이 내 주변을 감싸고 하늘의 별빛이 나를 비춰주었다. 걸음을 내딛으면서 지금 걷고 있는 이 순간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저산소증으로 인한 고통을 참으며 위로 더 위로 발걸음을 내 딛는 것은 마치 우리의 인생과도 같다. 그리고 나 혼자였다면 결코 히말라야를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 한 대원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함께했기에 히말라야를 올 수 있었다. 가족들의 이해와 직장의 배려가 있어서 히말라야에 올 수 있었다. 나는 산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인연들을 통해 다친 마음과 상처를 보듬을 수 있었다. 산은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었으며 뒤늦게 가족과 친구, 직장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었다. 바람과 돌과 얼음만 있는 곳을 지나고 얼마나 지났을까 칼라파타라 정상이라는 표식이 보였다. 
나는 결국 칼라파타라 등정을 성공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우측에는 히말라야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 정상과 힐러리 스텝이 보였다. 그 밑에서 히말라야의 꽃이 된 산악인 박무택, 백준호, 장민이 웃고 있는 듯하다. 온몸에서 전율이 흐르고 내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곧이어 말 할 수 없는 감정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히말라야를 원도 한도 없이 걷고 오르고 호흡을 했다. 나는 꿈을 이루었다. 칼라파타라의 정상에 서서 간절히 소망하던 꿈을 이룬 나는 과거의 고통을 털어내고 다시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또한 지난 일을 후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걸음을 내 딛을 때마다 고통을 주던 히말라야가 결국 나를 받아들인 것처럼 앞으로 내게 찾아올 고통과 인내도 나의 운명으로 담담히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히말라야에서 내가 아는 모든이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글·사진_윤주훈  CRETEC 고객서비스팀 차장·정리_한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