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발행인 칼럼] 공구 제조공장을 만들며
공구 제조공장을 만들며
대통령 각하께
1972년 6월 15일경,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만드는 공구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거나 부산에서 일본으로 어선들이 수출하고 오는 길에 기름탱크에 넣어가지고 오는 일본공구들이었다. 또 월남전에서 전투하고 나서 가져오는 공구도 있었다. 정코스로 나오는 공구는 별로 없었고, 일단 공구가 귀했다. 이래서는 어떻게 공구장사를 할 것인가, 이 정도는 우리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데, 내가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당시 26살 최영수에게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시 새마을 운동이 막 시작할 때라 겨를이 없었을 테지만 아마도 보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신 신제조 기술
2012년부터 국내 작업공구 대표브랜드인 세신버팔로가 운영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자금지원으로 협력했지만 점차 더 어려워져 2016년 회사 상표권을 인수했다. 새로운 결단이 필요했다. 사실 예전에는 한 공장에서 모든 것을 생산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하면 품질관리가 안된다. 미국에서는 이미 30년 전에 전문공장에서 생산을 해왔다. 대표적인 회사가 스탠리(디월트)이다. 일본에서는 자기공장에서 모든 걸 만드는 생산을 고집해왔으나 지금은 전문생산 체계로 바뀌고 있다. 이를 신제조 방식 생산이라고 한다.
세신버팔로는 세계 여러 곳에서 가장 품질이 좋고 관리가 우수한 공장들을 협력업체로 운영하고 있었고 그 모든 진행업무를 상호협의 하에 인계받았다. 이 과정에서 세신에서 35년간 공장장을 지내고 6년 전 우리회사로 와 있던 이흥진 실장이 역할을 많이 해주었다. 협력업체에게 잘하는 것은 유지하고 부족한 것은 새롭게 만들도록 했다. 세신버팔로는 국내외 약 25개 공장과 연결돼 몽키는 몽키 전문공장에서, 파이프렌치, 소켓렌치, 펜치, 니퍼 등도 모두 각각의 전문공장에서 생산한다.
그간 공구업을 하면서 세계의 훌륭한 공장이라는 공장은 다 가봤다. 이런 얘기하면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공장에 들어가면 나는 흡사 공구들과 대화하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과 공구 사이 신나는 대화가 깊어지고 특히 작업공구 공장은 더더욱 정겹다. 세신버팔로 신제조 생산을 하면서 모든 공장을 방문했다. 현장의 실정을 보고 금형을 만들고 새로운 디자인을 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해나갔다.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품질과 가격에서 더 나은 제품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다.
철공소, 노점, 해군, 공구회사… 훈련 거쳐 이젠 제조로
내게 왜 이런 일이 떨어졌을까 생각해봤다. 17살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조양철공소에 들어가서 선반공이 되고자 3년 가까이 노력했다. 또 1년 반은 공구노점상과 공구 행상을 했다. 이후 해군에 입대해 배를 타면서 공구에 관한 많은 공부와 경험을 했다. 그리고 다시 공구 소매상 수리점을 시작으로 납품, 도매, 또 해외무역까지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세신 신제조 기법으로 생산을 시작하면서 문득 48년 전 대통령에게 보냈던 편지가 생각났다. ‘내가 공구공장 하나 만들어 보자고 했던 것이 지금 세신이 되었구나’ 싶었다. 편지를 쓰며 꾸었던 꿈이 현실로 다가온 느낌이랄까. 나 스스로 이제야 답을 받은 것 같은 감격에도 빠진다.
나는 그동안 ‘책임’이라는 이름을 고객들로부터 들어 왔다. 지난 6월부터 세신버팔로 신제조 제품을 출시했는데,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고객들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다. 특히 품질분야에서는 ‘최고집’이란 별명대로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모든 계획이 완성된 후에는 세신버팔로 공장을 독립시켜 운영할 계획이다. 우리나라의 지형적 이점을 기반으로 더 좋은 공구를 만들어서 세계화로 나갈 것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신버팔로 공구브랜드를 만드는 것을 나의 최고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고객들께, 독자들께 많이 격려해주십사고 부탁드린다. 업계와 국민들이 모두 기뻐할 일을 함께 만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