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OLUMN

발행인 칼럼

 

 “한 번은 봐줘라”

 

다시는 그러지 말거라


1965년 조양철공소에서 소년공으로 일할 때였다. 당시 나의 꿈은 선반공이 되는 것이어서 2년 반 정도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월요일 아침, 도시락 두 개를 싼 채 집에 말하지 않고 서울로 가버렸다. 철공소 일이 힘들기도 했고 아침 8시부터 저녁 9시 15분까지 일하는 현실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서울시청 앞 대한일보사라는 신문사에서 잠을 자며 신문을 팔았고, 비 오는 날엔 우산도 팔았다. 이곳에서 내게 장사하는 재주가 있다는 것도 새삼 발견했다. 며칠 주간지를 팔아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이 팔았다. 그러나 한 주, 두 주가 지나자 집이 그리워졌다. 당시엔 전화가 없어 집에 연락도 못했기에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열흘이 지난 뒤였다. 집에선 온통 난리가 나 있었다. 회사에는 이미 자동퇴사가 되었을 것이라 여겨 돌아갈 엄두도 못 냈다. 
아버지께서 철공소 사장에게 나를 데려가셨다. 그땐 직원이 무단결근하면 자동퇴사 될 때였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조양철공소 허용 사장님은 “다시는 그러지 마라” 한마디 하시고는 나를 받아주셨다. 2주나 결근한 나를 같은 자리에 복직시켜 주셨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지금도 직원이 속썩일 때면 당시 철없는 나를 봐주던 사장님을 떠올려본다. ‘나도 한 번은 봐주자’ 생각한다. 

 

해군 복무 시 경남함에서. 함상 근무 중 UDT 훈련을 자원했지만 자퇴하고 말았다. ‘해군은 배에서 한번 내리면   다시 오를 수 없다’는 기준이 있었는데, 상관의 도움으로 이전의 같은 배를 타고 원래의 업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런 일로 오지마라


해군에 있을 때였다. 배가 출동에서 돌아오면 휴가가 자주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나는 집에 가기 싫었다. 휴가비도 없어 늘 빈털터리였기 때문이었다. 고심 끝에 휴가를 나와 공구행상을 했다. 공구와 고철을 서로 교환했고, 버스 차주 집에 고철을 보관했다. 그런데 차주가 버스조수를 고발했다. 고철 팔아 생긴 돈을 취했다는 이유였는데, 경찰이 조수에게 누구한테 고철을 팔았냐고 추궁하니 ‘공구장사하는 최영수에게 팔았다’고 한 것이었다. 나는 경찰서 조사실로 불려갔다. 군인이 휴가 나와 불미스런 일에 연루되면 헌병대에 넘겨질 수도 있었다. 등에 땀이 나고 안절부절 못했다. 몇 시간 넘게 조서를 쓰던 담당형사는 조사과장에게 보고했다. 휴가 나온 군인이 집안형편이 어려워 장사를 했다는 말들이 오고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보고 따라나오라 했다. 나는 바짝 긴장을 해있었는데, 그 형사님이 훈방조치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군복무 잘하고, 물건 살 때 조심하고, 다시는 이런 일로 오지마라.”
나는 눈물이 왈칵 났다. 고마움에 눈과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때 나를 한번 봐주지 않았더라면, 피도 눈물도 없이 내 죄를 만들었더라면, 나는 헌병대로 넘겨졌고 내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누군가 측은지심으로 한번은 봐준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

 

중고 군수품 공구거래를 끊게 된 이유


1979년 대구에서 직원 여섯 명을 데리고 공구 납품과 중도매를 할 때였다. 포니픽업을 사니 세상이 내 것이 된 양 의기양양했다. 기사를 시켜 부산까지 배달을 보냈다. 그런데 그 공구가 부산 톨게이트에서 걸려버렸다. 
당시 공구 상당수가 부대에서 나온 중고품 즉 군수품이었다. 결국 나는 중고펌프 한 대 때문에 관세청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20일 후 모든 문제를 풀고 나왔지만 매출은 반토막 나고 공급선도 끊겼다. 직원들만 눈물 글썽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일로 나는 중고 군수품 거래는 끊자고 다짐했다. 그 뒤로 교회 주일학교 선생이 되어 하나님께 ‘정직하게 장사하겠다’고 맹세했다. 세관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던 것도 주변에서 나를 대신해 해명해 준 덕분이고, 하나님께서 내게 ‘이번 한 번만이다’라며 꾸짖듯 봐주신 것이 아닐까 여긴다.

 

다시 돌아온 직원, 큰 성과로 이어져


나는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다. 은혜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용서도 꽤 받았다. 용서를 받은 덕분에 이렇듯 사업을 이어 올 수 있고, 직원들의 일자리도 마련하고, 국가와 사회에 도움되는 일도 할 수 있었다. 누군가 나를 단칼에 끊어냈더라면, 너그럽게 봐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있었을까? 자신이 없다.
회사의 A는 전산부문에서 아주 뛰어난 인재인데, 꽤 오래전 갑자기 회사를 그만둔 적이 있었다. 바코드 프로젝트를 하던 우리회사 부사장은 “저 A는 회사에 꼭 필요하다”고 내게 조언했다. 그러나 나는 다소 튀는 그의 행동과 판단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A는 회사를 나가 자기사업을 하다가 다시 내 회사로 돌아오고 싶다고 했다. 나는 고심했지만 과감히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날 이후 A는 크레텍이 자랑하는 여러가지 전산 시스템을 이루어냈다.
B도 마찬가지다. 거래처 발굴과 신제품 개발에 혁혁한 공을 세운 그였지만 회사 내에 반대나 잡음이 꽤 많았다. 규정을 벗어나는 직원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사장은 참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참아내고 어우러지게 했더니 그야말로 좋은 열매로 답하는 날이 꼭 오긴 왔다. 지금도 B는 거래처와 제품 발굴에서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가슴 펴고 사람 품으면서 사업 하자


‘크레텍은 재입사가 가능한 회사’라는 점 때문에 때론 오해를 받기도 한다. 물론 모두 재입사 되는 것은 아니다. 본인의 실수를 인정하고, 한 번 더 기회를 줘 정말 잘할 사람이라면 기회를 준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을 한다. 그 순간의 결정 때문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넌다면 우리 사는 삶이 너무 팍팍하지 않을까. 반대하는 임원들에게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한 번은 봐줘라! 같이 먹고 사는 세상에서 뭘 그리 뾰족하게 굴 것 있나. 한 번 더 기회를 얻는 사람은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최선을 다한다. 또 서로 다퉈서 찾아오는 직원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잘못된 것도 적당하게 넘어가라.
세상일에 너무 야박하게 굴지마라.
의도하지 않은 실수는 적절하게 넘어가라.
남의 실수나 부족함도 적당하게 넘어가라.”

 

일을 하다보면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할 때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경영 측면에서 보자면 잘잘못을 따질 힘으로 더 크게 사업의 미래를 그려보는 게 낫다.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풍요롭고 판단이 바로 선다.

 

“내가 남에게 저지른 잘못은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 남이 나에게 베푼 은혜는 잊어선 안 되고, 남이 내게 끼친 원망은 잊어버려야 한다.” - 채근담  

 

품이 넓어야 사업도 잘된다. 그늘이 큰 나무 아래 새도 모이고 꽃도 자란다. 너무 세세한 일에 매이기보다 통 크고 멋있게 발전하는 우리 공구업계가 되길 기원한다. 가슴 펴고 당당하게 사람 품어가면서 사업하시면 꼭 좋은 날이 있을 것이다.

 

 _ 최영수 크레텍 대표이사, 발행인, 명예 경영학·공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