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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최고 브랜드 허스크바나와 함께한 30년간의 이야기




유럽최고 브랜드 허스크바나와 함께한 30년간의 이야기


(주)경진이레 장호성 대표이사




솰라솰라~
‘똑똑.’
노크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서니 들려오는 첫 음성은 국어가 아닌 영어였다. ㈜경진이레 장호성 대표이사의 영어레슨시간. 장 대표이사는 바쁜 시간 틈을 내 캐나다인 개인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
“제가 최근 영어공부를 게을리 했거든요. 영어는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게 되잖아요. 그래서 얼마 전부터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32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임업기계 및 소형엔진기계 제품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스웨덴의 글로벌 기업 허스크바나의 한국총판 경진이레 장 대표이사와의 만남은 이렇듯 조금은 이색적이었다.


찾아온 인생의 터닝 포인트

장 대표이사는 20대 때부터 청계천의 한 공구상에서 직원으로 일했다.
“1974년도부터 4년 정도 일했습니다. 그 후 독립을 하게 됐는데 그 계기가 정말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 때문이었죠. 도둑 때문이었으니까요.”
장 대표이사는 사장에게 신뢰받는 직원 중 하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외부사람은 도저히 훔쳐갈 수 없는 곳에 놓인 물건이 없어지는 도난사건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사장 내외도 장 대표이사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물건이 반복적으로 사라지자 차츰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기적처럼 도둑은 잡혔다. 같은 날,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두 명의 도둑이 말이다.
“사장님 친척이 사장님을 만나러 왔다가 절도장면을 목격했죠. 절도범 중 한 명은 다름 아닌 거래처 구매 과장이었고, 나머지 한명은 전문도둑이었어요. 적은 금액을 구매한 뒤 없는 품목을 요구해 가게 점원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그 사이에 물건을 훔쳐가는 식이었죠.”
도둑은 잡혔지만 장 대표이사는 그날로 가게를 그만 뒀다.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더 이상 일을 지속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막막했어요. 당시 70년대 중반이었는데 ‘나까마’라고 아시죠? 중개상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때 아는 지인이 100만원을 빌려주신다고 했어요. 마지막 제 월급이 4만원이었으니까 엄청난 금액인 셈이죠.”
“가게를 나오고 나니 드는 생각이 ‘인심이나 쓸걸’이란 생각이었죠. 그때 물건의 구입과 지출을 내가 담당했었는데 ‘깍쟁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인색했거든요. 제 딴엔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했던 거였지만요.”
‘인심을 다 잃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장 대표이사는 뜻밖의 평판을 알게 됐다.
“저에게 깍쟁이라고 핀잔을 주던 사람들도 뒤돌아서는 제 칭찬을 했더라고요. 일하려면 저처럼 해야 한다. 우리가게 직원도 나 같았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이런 평판은 곧 조건 좋은 제의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돈은 나중에 팔아서 갚으라며 먼저 제게 제의를 했어요. 가게에서만 일하던 제게 나까마란 것이 처음에는 쑥스러웠죠. 하지만 주위 사람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주고 격려해준 덕분에 한 달 만에 50만원을 벌었어요. 물론 그 금액은 첫 달뿐이지만요. 이 50만원에 100만원을 빌려주시겠단 지인으로부터 50만원만 빌려 새롭게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영어까막눈, 계약 위해 홀로 스웨덴으로

1978년 경진기공사로 첫 가게 문을 열었다.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다가 장 대표이사는 엔진톱을 취급을 결심했다. “엔진톱을 찾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어요. 당시 외국에서 물건을 들여와 파는 곳이 대여섯 군데 있었고요. 우린 후발주자인 셈이네요. 손님이 찾으니 구해다 팔았죠. 그러다가 직접 수입해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일본제품을 수입했지만 품질이 낮아 실패했어요.”
이후 장 대표이사는 무역관계자들에게 의뢰해 스웨덴의 허스크바나란 브랜드를 알게 됐다. 허스크바나 제품 품질에 확신을 가진 장 대표이사는 이 업체와 계약을 하지 못하게 되면 사업을 접겠다는 각오까지 했다고 했다.
“그때는 텔렉스를 썼을 때였어요. 전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요. 영어를 잘하는 지인의 도움으로 허스크바나와 공문이 오고갔고 결국 계약을 위해 스웨덴에 가게 됐죠.”
당시 여러 나라를 경유해 스웨덴까지 가는 경비는 약 150만원 선.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사업진행 초기부터 도와준 지인에게 후한 사례를 약속하고 함께 가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돌발 상황이 당일 날 벌어졌다.
“아직도 잊지 못해요, 스웨덴으로 가던 그날을요. 제 입과 귀가 될 지인 분에게 출국금지조치가 내려졌어요. 어떤 고소사건에 연루돼 있었어요. 지인도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죠.”
토요일 12시 30분 싱가포르 비행기. 모든 것을 접고 공항에서 되돌아오느냐, 각오를 하고 홀로 스웨덴 행을 택하느냐 장 대표에게는 비행기 출발시각이 그야말로 운명의 시간인 셈.
“도저히 돌아갈 수 없었어요. 전날 교회에서 저를 위해 특별 기도를 해줬고, 친구들이 격려차 포니 자동차까지 빌려 공항까지 배웅 받았거든요. 그분들을 생각하니 도저히 되돌아오지 못하겠더라고요.”
더 솔직히 말하면 장 대표이사는 ‘창피함’이 컸다고 했다. 지인의 동행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오랫동안 준비해온 계약이 불투명하게 돼버린 것은 충격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출국도 못해보고 되돌아갔을 때 당할 창피는 모면해야한다는 생각이 컸다.
“‘에잇, 그냥 갔다만 이라도 오자’ 마음먹었죠. 그 한국 대리점을 딴다는 거창한 목적 따윈 잊은 지 오래였지요.”
장 대표이사의 첫 해외여행이 이렇게 꼬여버리게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비행기에 탑승한 그는 이륙하자마자 자리에 일어나 무작정 인상 좋은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 분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서울에서 싱가포르, 파키스탄, 스위스, 덴마크, 그곳에서 또 버스이동……. 지금과는 달리 스웨덴 가는 길은 엄청 복잡했어요.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분이 게이트까지 안내해주고 비행기 환승 수속도 다 해주고 그랬어요. 그분의 손을 꼭 붙잡고 갔던 기억이 나네요.”
다행히 무사히 스웨덴에 도착, 미리 잡아둔 호텔에 머물 수 있었다. 도착한 시간은 한국시간으로 월요일 새벽 4시. 김포공항에서 출발해 스웨덴까지 40시간이 넘게 걸린 긴 여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환승 일정이 단 한순간이라도 틀어졌더라면 영어를 할 줄 몰랐던 전 국제 미아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허스크바나, 그의 열정에 감동하다


허스크바나 측에서 온 직원은 3명, 첫 만남은 어색한 웃음뿐이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어요. 왔는데 말이 하나도 통하지 않으니, 닷새 일정이었는데 첫날은 서로 웃다가만 헤어졌어요. 둘째 날에는 밥을 사주더라고요. 사흘째 되는 날 통역을 할 한국분이 오셨어요. 허스크바나 측에서 본사에 요청해 미팅장소에서 300km나 떨어진 스톡홀름에서 한국 분을 데려온 거였어요.”
덕분에 장 대표이사는 전후사정을 설명할 수 있었다. 돌아온 반응은 놀라움이었다.
“통역하시던 분이 40대 중반의 여성분이었는데 제 사정을 좋게 설명해주셨어요. 이야기를 들은 허스크바나 측에서 ‘미스터 장이 계약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영어도 못하면서 홀로 스웨덴에 왔다’며 그 열정이 대단하다고 감동을 받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좋은 이야기가 오고갔다. 이후부터 경진이레는 허스크바나의 제품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장 대표이사는 지금 생각해보면 30대의 젊은 청년의 신용과 열정을 허스크바나 측에서 높이 평가해준 덕분인 것 같다고 했다



나만의 거래 필수 무기, 영어

“이 때 영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어요. 돌아오자마자 영어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지금은 영어를 하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통역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땐 영문과를 나와도 영어회화는 못하는 때였습니다. 문법만 알고 입도 뻥끗 못하는 영어전공자들이 대부분이었죠. 사업을 하면서 학원을 다니며 틈틈이 공부를 했습니다.”
한번은 장 대표이사가 말레이시아에서 국제회의에 참석할 때였다.
“통역을 데리고 갔는데 그 통역관도 이 계통의 전문용어를 모르니까 제게 또 물어보더군요. 답답함을 느꼈어요. 직접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전 프레젠테이션도 직접 합니다.”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장 대표이사는 2년 동안 영어를 소홀히 했다고 했다.
“최근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영어공부를 다시하고 있습니다. 영어가 회복되는 중이죠. 어제도 외국인과 전화통화를 30분은 거뜬히 했습니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제 회화를 들으면 잘한다고 느끼겠지만 영어 잘하는 사람이 들으면 제 영어는 아직도 콩글리시겠죠. 그래도 의사소통이 되는 게 중요합니다.”
장 대표이사가 영어공부를 하는 데는 그의 활발한 해외 출장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허스크바나가 워낙 세계적인 그룹이기 때문에 출장이 많은 편이죠. 상황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할까요? 경진이레가 허스크바나가 아닌 한국기업의 대리점을 하고 있었다면 해외출장도, 영어를 사용할 일도 없었겠죠?”
실제로 개인교사와 함께 이야기하는 장 대표이사의 영어는 막힘이 없었다



늘 큰 힘이 된 신앙생활


“‘꿈은 이뤄진다’라는 말이 있죠? 전 그렇게 보면 꿈이 이뤄진 셈이네요.”
김포에서 나고 자란 장 대표이사는 등하굣길에 김포공항에 이착륙하는 비행기를 보면서 ‘비행기를 타면서 사업을 해보고 싶다’고 막연히 꿈꿨다고 했다. 지금까지 장 대표이사가 비행기를 탄 횟수는 한 항공사만 세더라도 400여 번이 훌쩍 넘는다.
“1년을 넘는 시간을 비행기에 있었던 셈이죠. 꿈이었는데 이뤄졌어요. 이게 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이뤄진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장 대표이사는 신실한 기독교인이다. 그는 신앙생활이 성공의 큰 힘이 됐다고 강조했다. 신앙이 있기에 자신의 약한 의지력을 붙잡을 수 있게 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도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경진이레의 기업문화에서 신앙적인 것을 뺄 레야 뺄 수 없다.
“매주 월요일 6시 50분까지 직원들이 출근합니다. 목사님을 초청해 찬송가도 부르고 예배도 드리죠.”


A/S와 투자, 그 중요성

최근 경진이레에 좋은 소식이 있었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한 송혜교, 조인성 주연의 미니시리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 PPL(간접광고)를 하게 된 것.
“방송국에서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가 전시회에 참가를 많이 하는 편인데 그 곳에서 보고 연락한 것이죠. 정원 장면에서 허스크바나 그룹의 독일 브랜드 가데나 제품을 사용했는데 소비자들에게 동영상을 보여주니 반응이 좋아서 저희도 흡족해 하고 있습니다.”
장 대표이사는 투자에 인색하지 않다. 매년 딜러컨퍼런스를 개최해 허스크바나 제품을 취급하고 있는 공구상을 초청해 A/S 등 기술교육을 실시한다. 배우고,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기본적인 비용은 경진이레에서 부담한다. 반응이 너무 좋아 처음 40여명으로 시작한 딜러컨퍼런스는 이제 100여명을 훌쩍 넘겼다.
A/S도 경진이레가 내세우는 강점 중 하나다. 장 대표이사는 A/S 시스템이 이처럼 잘 된 곳은 드물 것이라고 호언했다.
“저희가 판매하고 있는 허스크바나 제품의 모든 부속품을 다 보유하고 있습니다. 신속히 수리가 가능할 수 있도록 말이죠. 외국 제품은 A/S가 길어진다는 이유로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저희는 최대 10년 전 출시제품까지 무리 없이 수리 가능합니다. 경기도 하남에도 수리 센터를 따로 운영하고 있고요.”
마지막으로 현재 (사)한국산업용재협회에서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다는 장 대표이사가 협회에 하고픈 말이 있다고 해서 들어봤다.
“최근 전국 순회를 돌며 느낀 게 있습니다. 변화도 실감했지만 우리 업계에는 여전히 훌륭한 분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생각이 건전한 많은 분들이 있다는 것을요. 협회에 애정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그분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며 겸손함을 잃지 않는 장 대표이사, 그와 함께 제몫을 든든하게 해주는 20여명의 직원이 있는 한 경진이레의 앞날은 언제나 맑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