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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남은 제품이 영업사원입니다”




“희남은 제품이 영업사원입니다”

국내 최고 품질 드릴링 머신, 희남정밀공업사 정춘웅 대표



대구 북구 노원3가. 3공단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에 희남정밀은 위치해 있다. 46년간 국내 최고 품질의 드릴링, 탭핑 머신을 만들어내며 ‘희남’이라는 브랜드에 더욱 가치를 더해주고 있는 정춘웅 대표. 오로지 장인정신으로 드릴링, 탭핑 머신 생산에 전념하며 완벽한 제품을 위해 늘 연구, 개발을 게을리 하지 않는 정 대표를 통해 46년 희남의 스토리를 들어봤다.


희남철공소 문을 열다


현재 희남정밀의 초석이 된 희남철공소는 지난 1968년 2월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지금은 고성동이라고 그러죠? 대구 중구 태평로에 15평 규모로 ‘희남철공소’를 설립했습니다. 저 혼자 한 것은 아니고 인척관계에 있던 동업자 한분이랑 함께 철공소를 시작했어요.”
경북 성주 출신인 정 대표는 대구로 올라와 한 철공소에서 4년 정도 일하며 기술을 익혔다고 했다. 당시 희남철공소는 지금과 달리 드릴링 머신을 전문으로 제작하지 않았다.
“그때는 식품기를 전문으로 생산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드릴링 머신을 제작하게 된 때는 70년대 초반. 정말 우연처럼 시작한 드릴링 머신 제작이었다.
“70년대 초 동업관계를 청산과 함께 철공소도 접으려고 생각했습니다. 공구상을 할까 생각했죠. 하지만 철공소 인수자를 쉽게 구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 길을 계속 가게 된 것이죠.”
정 대표의 말에 따르며 드릴링 머신은 그의 필요에 의해 스스로 만들게 됐다.
“식품기를 제작하면서 제가 드릴링 머신이 필요하게 됐어요. 그래서 스스로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죠. 만들어서 사용하는데 고장 없이 잘 작동되는 겁니다. 그래서 드릴링 머신을 조금 더 연구, 개발해 생산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죠.”



드릴링 머신 국산화 성공


정 대표는 1972년 4월 산업 발전과 경제성장에 맞춰 철공소의 이미지를 탈피, ‘희남공업사’로 상호를 변경해 본격적인 드링릴 머신 연구 개발에 착수했다.
“그때는 일본 브랜드가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드릴링 머신은 초보단계 시절이었죠. 저희가 드릴링 머신 제작에 성공해 시장에 제품을 내놓기 전까지는 일본의 키타카와, 키라 등의 제품이 국내 시장을 모두 점유하고 있었죠.”
정 대표는 드릴링 머신을 국내에서 생산하기 위한 연구 개발에 몰두했다. 해외 브랜드의 머신을 참고해 다수의 시행착오를 거치는 등 최고 제품의 드릴링 머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기본적으로 제가 연구, 탐구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궁금증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편이죠. 문제가 발생하면 늘 해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요.”
“당시 서구 원대동으로 공장을 옮겼는데 이전하면서 100평으로 확장을 했어요. 그 사이 많은 발전을 한 것이죠.”
희남공업사의 거침없는 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정 대표는 희남정밀로 상호를 변경함과 동시에 대구 달서구 갈산동으로 또 한 번 이전확장, 500평이 넘는 부지에서 머신 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품’자를 획득하다


희남정밀은 드릴링 머신업계의 주목을 받으며 1988년 한일은행이 지정하는 ‘중소기업유망업체’에 선정돼 그 기술력을 더욱 인정받았다.
이와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의 품질인증도 받게 됐다. ‘품’자 획득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은 없어져 버렸지만 아직도 많은 중장년층은 ‘품’마크를 떠올리면 ‘뛰어난 품질’을 함께 연상시키고는 한다.
지금 세대에게는 조금은 생소한 ‘품’마크는 공업진흥청에서 합리적인 공업표준을 제정함으로써 제품의 품질개선과 생산능률의 향상을 기하며 거래의 단순화와 공정화를 도모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로 1970년대 초반부터 널리 쓰였다.
“저는 늘 제품을 만들 때 소비자를 위해 우수한 품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저희 노력은 1992년 공업진흥원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품’ 인증을 받게 된 것이죠. 그때 이 분야에서 ‘품’ 인증을 획득한 곳은 희남과 다른 한 곳 뿐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희남의 물건은 품질에 자신이 있었죠.”
희남의 제품에 당당히 국가 보증 ‘품’자를 내세울 수 있게 되면서 희남정밀의 직원은 80여명으로 늘어나고 거래처는 최대 170여 곳을 넘어설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IMF, 몰아친 시련


당시 70~90년대에는 지금과 달리 어음결제가 전부인 시절이었다. 희남정밀 역시 대금결제 대부분을 어음으로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 대표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외환위기, IMF가 도래해 국내 경제가 크게 위축된 것이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정말 지금도 암담합니다. 우리 같은 공장들은 대부분 거래처와 어음결제가 통상적이었죠. 그런데 어음을 지급한 거래처 상당수가 부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저희가 받은 어음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액수가 당시 금액으로 수억을 훌쩍 넘었습니다.”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자금융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다시 일어선다는 건 꿈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왔나 싶을 정도로 그 시절은 힘들었어요. 사업을 다시 일으킨다는 건 꿈도 못 꿨죠. 그런데 천사처럼 제게 도움을 준 분이 있었습니다.”
지인을 통해 알게 된 한 분이 정 대표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선뜻 빌려준 것.
“제가 당시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생면부지의 모르는 사람이 재기하라며 돈을 빌려줬어요. 특별한 조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이자가 높았던 것도 아니었죠. 정말 크게 도와줬어요. 덕분에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죠.”
넓었던 성서공단의 부지를 다 정리하고 현재 위치한 노원3가로 공장을 옮겼다.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의 규모였지만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정 대표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아낌없는 투자가 만든 당당한 20년 품질보증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희남정밀의 제품은 같은 업계에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이는 정 대표가 확신하며 가장 내세우는 희남만의 장점이기도 하다.
“희남 제품은 견고하며 장기간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늘 직원들에게 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좋은 제품이 곧 영업이다’라는 말입니다. 저희 희남에는 영업사원이 없습니다. 제품을 사용해 본 고객들이 또 다시 우리 제품을 찾기 때문이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저희 제품을 소개시켜 주고요. 그렇게 저희는 고객들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멀리 지방에서 저희 공장에 직접 제품을 상담하고 구매하러 온 분들이 많습니다. 제품은 마음에 드는데 어디서 파냐고 물어물어 대구까지 찾아온 것이지요. 교통편도 불편했을 텐데 먼 길 찾아와 준 고객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지금까지 제가 노력해온 것들을 보상받는 기분이 들어 흡족합니다.”
희남의 제품은 다른 회사의 제품보다 가격 면에 있어서 조금은 값이 나가는 편이다. 하지만 희남의 물건을 써 본 사람은 비싸다, 싸다 가격을 따지지 않고 구매한다고 한다. 이게 다 제품에 대한 신뢰 때문이라는 게 정 대표의 말이다.
“저희 제품은 가격에 있어서는 크게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국내 조선소와 일본 조선업계에 납품과 수출을 할 정도로 제품의 우수성은 알아줍니다. 제품의 수명도 타 제품에 비해 월등히 길고요. 그래서 저희는 물건을 팔 때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20년 품질보증을 장담한다’고 말이죠.”
이렇게 고장률이 적은 제품을 내놓기까지 정 대표는 개발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1등 제품 생산에는 많은 개발비가 들어갑니다. 제품개발에 성공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투자비는 고스란히 공중분해되는 것이나 다름없죠. 하지만 그렇게 투자했기에 지금의 희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객의 수요에 맞추다 보니 이뤄진 결과인 셈입니다. 오랜 시간 개발연구를 통해 쌓여진 기술노하우는 그 어떤 곳에서도 따라올 수 없는 우리만의 보이지 않는 자산입니다. 이것에 저희는 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지금은 30여종 다양한 드릴머신 생산으로 불황을 모르는 기업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훗날 어려운 이웃 돕고파


정 대표에게는 아직 이루지 못한 오랜 꿈이 있다고 했다.
“희남의 계속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던 90년대에는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장학재단을 만들어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 꿈을 이루지 못했어요. 그게 가장 마음에 남습니다.”
하지만 정 대표는 이 꿈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 전처럼 거창하게 장학재단을 세울 수 없을지언정 지금도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는 꿈은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것이지 혼자 사는 것이 절대 아니니까요. 이제 제게는 돈 욕심보다는 희남이라는 브랜드를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더 큽니다. 희남을 알아주고 찾아주시는 고객들을 위한 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왔으면 남을 우해 한 가지는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만들어 놓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는 그. 내 물건을 알아봐주는 소비자들이 있기에 항상 즐겁게 일한다는 그가 있기에 희남의 제품은 그 가치가 더 빛을 바라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