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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30여 나라로 수출하는 에어 타카 제조회사




전 세계 30여 나라로 수출하는 에어 타카 제조회사

(주)제일타카 오왕근 대표



30살에 시작한 겁없는 도전


제일 타카의 설립자 겸 CEO인 오왕근 대표는 1952년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경기도용인의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시골에서 성장했기에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하여야만 했고 그래서 오왕근 대표가 사업을 시작한 것은 20대였다고 한다.
“제가 태어난 1950년대는 모두가 굶주리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철공소에서 일했죠. 그때 당시는 사회는 제대로 된 직장도 잘 없었어요.다들 먹고 살기 어려웠으니까. 그만큼 나라가 가난했고 모든 것이 부족했어요. 철공소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 학교에 다녔고 그러다 연마기기 제작 회사에 다녔었어요. 그러다 경험을 살려 27살 되던 해에 연마기기를 제작하는 회사를 설립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상공부에서 공작기계는 표준기계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법령을 발포했어요. 그에 맞는 설비 기기를 구하기 어려워 사업을 접었고 그 후 사회선배를 통해 우연히 타카를 만났어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이걸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때만 하더라도 제품 제작은 전부 수작업이었어요. 그런데 일본제 타카를 보면서 수작업이 되던 공정이 반자동이 되잖아요. 당시는 한국 공업력이 무척 약했는데 30살에 겁도 없이 도전한 셈이죠.”
오왕근 대표는 다카를 처음 본 순간 큰 매력을 느끼고 사업아이템으로 삼게 된다. 당시에 목수들은 망치로 힘들게 직접 못을 박아 제품을 제작했는데, 압축공기의 힘으로 손쉽게 못을 박는 에어 타카는 매력적인 제품이었다.


못으로 번 돈이 연구개발비

그러나 아무런 기술력이 없는 상황에서 타카를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사업 초창기 때는 제작 설비도 제대로 없었기에 정밀도가 뛰어난 부품을 만들수가 없었다. 그래서 설사 작동이 되더라도 쉽게 고장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마디로 기술력이 없었어요. 대한민국 사람 중에 타카의 구조적 기능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처음에는 외국 기계를 보고 똑같이 카피했죠. 그런데 이상하게 겉모습은 똑같은데 성능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많은 양을 만들지 않았죠. 한 달이면 20대를 생산했거든요. 거진 손으로 일일이 만드는 수작업이었어요. 제작비용도 비용이었지만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었죠. 한 분야 만들면 그게 어떤 때는 다 폐품을 시켜야 할 때도 있었죠. 작동도 안 되고 설사 판매를 하더라
도 소비자가 문제가 있다고 하면 그 제품은 다 폐기를 하고.”
제일 타카의 초창기는 오왕근 대표를 비롯한 3명이 함께 시작한 아주 작은 기업이었다. 가진 공장도 없어서 야간에 아는 분 공장에 들어가 밤에 일했을 정도. 그때의 그 초창기 구성원은 지금까지도 함께 일하는 든든한 사업 파트너다.



“3명이 함께 일하는데 제대로 된 타카를 생산하지 못하니 경제적으로 힘들었죠. 가진 돈은 다 바닥이 나고. 그런데 죽으란 법은 없다고 타카 못을 생산해서 제작비나 연구 개발비를 충당할 수 있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못도 엄청나게 비싼 제품이었거든요. 지금이야 못이라고 해야 가격이 비싼 것이 아니지만, 그때는 못도 수입했어요. 수입 못 한 상자가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는 그 수입품의 반값에 못을 팔았죠. 타카를 접하면서 못도 알게 된 거니까.”
총이 강력한 것은 총알이 있기 때문이다. 총알 없는 총이 아무것도 아니듯 타카 못없는 타가는 아무 소용이 없다. 1980년대 당시는 일반 못조차도 비싸고 귀했던 시절. 다카에 걸맞은 좋은 타카 못도 구하기 어려웠기에 제일 타카에서 만든 못은 시장의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품질로 앞서고 AS가 받쳐주고


좋은 품질의 타카 제작의 길은 힘들었다. 제작을 시작하여 5년 동안 많은 고생을 했다. 타카를 만들어 놓으면 팔리지 않고 팔리더라도 기능에 문제가 있어 반품이나 AS에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이걸 접어야 하겠다 할 때도 몇 번 있었죠. 감당이 안 되는구나 싶을 때도 있었고.초장기 때 포기할 뻔 했지만 그래도 이 타카라는 것이 미래에는 희망이 있는 물건이라고 확신을 했어요. 그래서 포기하지 않았죠. 초창기였던 80년대 당시 국내 타가는 목수들이 사용하지 않았어요. 국내 제품을 있더라 하더라도 선호도가 떨어졌고. 87년도에 수입 기계가 그때 당시로 30만 원 초반이었어요. 30년 전에 말이죠. 그때에 비하면 지금 타가는 저렴하죠. 그런데 우리는 13만 원에 팔았거든요. 그때 당시 목수 월급이 15만 원 했어요. 월급의 2배를 주더라도 목수들은 수입 다카를 쓰는 거예요. 국산은 싸더라도 품질을 못 믿겠다 그러고. 하지만 저 스스로 제일 타카도 이 정도면 되겠다 싶을 때였어요. 일단 써보고 괜찮으면 그때 돈을 받겠다하고 그렇게 영업을 했죠.”
1980년대 당시 타카시장은 일제, 미제, 독일, 이탈리아 4개 나라의 제품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대만제품도 타카시장에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대만제품이 들어왔기에 제일 타카가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때 대만 제품도 가격을 비싸게 받았거든요. 그런데 소비자가 써 보니까 가격은 비싼데 제일타카 제품이 더 나았던 거죠. 618이라는 모델이 그때 저희가 생산하는 모델이었는데 그때 대만제품보다 낫다는 소문이 돌면서 히트를 한 거죠. 그때부터 소비자들의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때 이후로 제일타카는 품질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기술력이 없을 당시 구축해 놓았던 AS 시스템은 제일 타카의 품질과 더불어 소비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게 되고 그때 이후로 제일타카는 사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위기의 IMF가 전화위복으로


매년 사세를 확장하던 제일타카에도 위기가 왔다. IMF가 바로 그것. 평소의 매출이100%였다면 IMF 당시에는 절반 이하인 30% 정도로 매출이 떨어졌다.
“그때 사세 확장으로 새로운 공장 터를 구매하려고 하던 차였거든요. 좀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이었는데 IMF가 터졌죠. 그래서 공장 계약금도 날릴 수밖에 없었어요. 부도난 어음도 많이 들어오고 직원들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일주일에 3일 4일밖에 일을 하지 못해서 월급이 절반가량 줄어들었으니까. 다행히 10개월이 지나자 조금 숨 쉴 수 있더군요. 그리고 그때 당시에 실내장식 업계가 활황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조금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 다른 업종에서 일하시던 분들이 다들 어려워업종을 바꾸며 실내장식을 바꾸게 된 거죠.그래서 타카를 찾는 분들이 많아 매출이 늘어났습니다.”
IMF 때문에 고생도 했지만, 환율이 크게 올라 수입 제품의 가격 경쟁력은 크게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를 제일타카가 자리 잡게 된 것. IMF는 위기였지만 또 다른 의미로 기회이기도 했다.



중동시장의 인기 상품 제일타카


제일타카는 재작년부터 해외 시장의 매출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이란과 같은 중동 지방에서 제일타카의 인기와 인지도가 높다. 그 덕분에 폴란드 사우디 등과 같은 거래가 없던 나라에도 수출을 진행할 수 있었고 2011년에는 100만 불, 2012년에는 400만 불 해외매출을 달성하는 등 구체적인 성과를 이루었다. 그렇기에 작년 하반기 국내 경기가 악화 되었지만 해외 수출 물량 증가로 최근에도 주 3일 야근 생산을 유지 하고 있다.
“자만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제 국내는 어느 정도 평정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회사는 계속 성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해외로 눈을 돌려야 했어요. 국내 시장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1년이면 10번 이상 해외 박람회나 전시회에 참석합니다. 그렇게 꾸준하게 전시회 참석을 통해 신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도 얻고 전 세계 타카시장에 대한 현황도 분석하고 있지요.”
제일타카의 올해 해외 시장 매출 목표는 700만 불이다. 그만큼 국내는 물론 세계시장에서도 제일타카의 이름을 알리고 있는 셈. 제일타카는 미국과 더불어 중국에 JITOOL 공장을 완료하였고 앞으로는 중국 시장 개척에 더욱 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제일타카 100여 명의 직원들과 오왕근 대표는 제일 타카 제품을 통해 대한민국을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