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ERS
상진공업사
수공구는 의외로 많은 기술력을 요구하는 제품이다. 간단하게 보이는 수공구라 모양이 같으면 성능도 같을 것 같지만 비슷한 모양인데도 잡아보고 직접 써보면 그 느낌이 다르다. 미묘하게 편리하고 사용하기 편안한 수공구인 반면 어떤 수공구는 같은 모양임에도 사용하기 불편하고 피로하다. 그것이 바로 기술력의 차이다. 상진공업사의 흙손도 마찬가지. 다른 회사의 흙손과 비교해 뛰어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세밀한 부분의 차이가 모여 명품이 되는 것이다. 상진공업사의 흙손은 타사 대비 가볍고 튼튼하며 손에 쥐었을 때의 편안함과 더불어 들었을 때의 무게 밸런스까지 고려해 제작되었다. 사람이 직접 잡아 휘두르고 힘을 가하는 수공구는 그런 장점이 모여 뛰어난 명품이 되는 것이고 제조사의 기술력이라 말할 수 있다. 심지어 뛰어난 기술력으로 불필요한 공정을 최소화해 제작 단가를 낮추어 성능대비 가격이 저렴한 제품이다. 상진공업사를 세운 황규환 대표를 만나 이야기해 보았다.
“제가 14살 때 서울에 올라와 철공소에서 일을 하면서부터 흙손을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직장을 구해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거죠. 참 운 좋게 제가 들어갔던 철공소는 톱과 흙손을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흙손 만드는 법과 톱 만드는 법을 배웠죠. 철을 다루어 도구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게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사회생활을 하는데 나중에 둘째 형님이 철물 도매상을 크게 하셨거든요? 철공소를 나와 독립해서 톱과 흑손을 만들어 형님께 납품을 하고 다른 공구상 곳곳에도 제가 만든 흙손을 선보였죠. 철공소에서 일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웠습니다.”
밤을 새워가며 일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제품에 대한 이해와 철을 다루는 것에 대한 이해를 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청춘을 다치는 젊은 시절을 철과 함께 보냈다. 그렇게 기술을 익히고 주위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철물 도매를 하던 형님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금을 지원받고 매제와 남동생과 함께 시작했다. 기계화되지 않고 일일이 손으로 제작했던 때다. 황규환 대표가 서울에 올라온 지 20년 만에 자신의 기업인 상진공업사를 세울 수 있었다. 톱을 제작하기에는 손이 많이 가고 만들 사람이 모자랐기에 주로 흙손을 만들기로 했다.
제대로 된 흙손을 제작해서 판매했기 때문에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하지만 곧바로 큰 돈을 벌 수는 없었다고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지만 많은 설비가 부족했기에 많은 공정을 거쳐야 했고 그래서 고생에 비해 마진이 남을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중동 국가 건설 붐을 타고 상진공업사에도 기회가 찾아온다. 대우건설에서 사람이 찾아와 대량 납품이 가능하냐고 물어온 것이다. 당시 중동 국가들은 오일파동으로 넘쳐나는 오일달러를 도로, 항만, 공항 등 사회 간접 자본에 쏟아 부었는데 중동국가들은 빠르고 싸게 건물을 짓는 한국 건설사들에게 물량을 던져주었다. 한국 건설사들은 한국인 기술자와 작업자들과 함께 한국산 공구를 중동으로 가져갈 요량이었다. 수 천명이 몇 년을 사용할 물량. 상진공업사의 생산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주문이었다.
“톱은 전기톱이 나오고 여러 곳에서 제작하는 곳이 많았지만 흙손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곳은 잘 없었거든요. 그래서 흙손을 시작했는데 대량으로 제작하기에는 기계나 설비가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직접 손으로 두드려서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큰 기업에서 대량 주문을 했기에 대금 지급을 잘 해줄 것을 믿고 설비를 투자해서 제품을 제작해 납기일에 맞췄어요. 밤새 기계를 돌려 제품을 만든 것이죠. 어음을 받기로 했는데 어음을 주고 어느 정도 할인된 금액의 현금을 받는 어음깡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래도 설비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 만한 돈이었습니다. 그때 그 중동건설 붐으로 지금의 상진공업사로 도약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예전의 흙손은 맞춤으로 제작하곤 했다. 지금도 사용자가 원하는 사이즈에 맞게 맞춤으로 제작해주는 곳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곧바로 구매해 사용하기 힘들다. 미장이에게 흙손은 무사의 칼과 같다. 흙손이 없으면 아무 일을 할 수 없다. 상진공업사는 그것에 착안해 설비를 도입하여 기성복처럼 흙손을 만들었다. 다양한 제품을 다양한 사이즈로 수 십 가지 만들어 고객의 요구에 부응했다. 그것은 그대로 소비자의 호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8,90년대 호황이 끝나고 IMF가 찾아온 것. 흙손은 건설경기를 많이 타는 제품이다. 건설경기가 완전히 무너진 IMF 때는 공장 운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건설현장을 보면 대기업 건설사가 모든 것을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외주에 외주를 주어 이루어지는 시스템이죠. 그런데 대형 건설사가 부도를 맞습니다. 그럼 1차 외주 건설사가 돈을 못 받아 부도를 맞고 동시에 2차 외주 건설사가 부도. 일반 건설현장 근로자는 임금을 못 받고 물건을 대어준 공구상이 큰 타격을 받겠죠. 그럼 그 공구상에 납품을 한 저희도 타격을 받는 겁니다. 재고로 쌓아둔 물건을 팔아도 돈은 받지 못하고 그러니 재료값이나 인건비도 못 건지는 거죠. 그런데 IMF 불경기가 국내 건설경기가 다 무너뜨려 주문도 안 들어오는 겁니다. 참다 참다가 직원들을 내보내는 수밖에 없었어요. 도저히 못 버티겠더라고요. 그러다 6개월이 지나 다시 공장을 정상화 시킬 때 돌아와 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는데 상당수 많은 직원분들이 저희 공장에 다시 와주셨어요. 정말 그때 힘이 나고 눈물도 나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조 공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품에 대한 이해와 기술력이다. 그러한 기술력은 베테랑 작업자들로부터 나온다. 상진 공업사의 베테랑 작업자들은 IMF 위기로 잠시 중단되어 떠났던 공장에 다시 돌아와 공장을 정상 가동시켰다. 이처럼 IMF 위기를 극복하고 상진공업사가 예전의 활기를 되찾게 한 원동력은 직원과 회사와의 끈끈한 정이다. 예전에는 빌라를 두 채 사서 아래층 위층 공장직원과 대표 가족이 함께 살면서 식사도 함께 할 만큼 모두가 가족 같은 분위기다.
“상진공업사가 업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세계 어디를 내놓아도 뛰어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역시 베테랑 기술자들과 회사의 화합 덕분입니다. 덕분에 흙손에 있어 생명과 같은 견고함과 정교함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지요. 타사 대비해 튼튼하게 오래 사용하면서 흙손 평판도가 뛰어난 제품을 제작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제품을 제작하는 상진공업사의 흙손을 앞으로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상진공업사는 소비자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많은 연구비를 투자하여 많은 금형을 제작해 보관하고 있다. 동시에 몇 년 전 부터는 황규환 대표의 아들 황준선씨가 공동 대표가 되었고 대형 공구유통사와 거래를 하면서 안정적인 생산을 꾀하고 있다. 이처럼 업계 최고가 되기 위해 늘 변신하고 노력하는 상진의 미래는 밝다. 그래서 프로 미장이들이 사용하는 공구들 중 상당수가 상진의 제품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글· 사진 _ 한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