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억 이상 기부왕
서원콤프레샤㈜ 박종옥 대표
협회 성장이 곧 산업용재업계의 성장
더불어 사는 밑거름, 많은 공구인들 동참하길
지난 12월 서원콤프레샤 박종옥 대표(서원재단 이사장)가 (사)한국산업용재협회 회관 건립을 위해 선뜻 1억원을 기부했다. 그는 “산업공구계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었다. 앞으로 공구계가 더욱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전하며 가족, 직원, 지역사회 기부를 넘어 사업의 바탕이 되어온 공구계에도 힘을 보탰다. 그는 20여년간 장학금 및 보조금 전달, 무료급식 봉사, 연탄 배달, 재단 설립 등 수많은 이웃사랑을 실천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2014 아름다운 납세자상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고 2015 경기도 착한기업에 선정됐다. 국내 콤프레샤 대표기업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도 남다른 이웃사랑이 바탕이었다. 이렇게 공구계를 빛낸 인물이지만, 의외로 그의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인터뷰 요청에도 ‘어딜 나서는 것 안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를 어렵게 설득했다. 숨겨진 기부천사 박 대표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콤프레샤 하면 서원이라는데, 대표님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잘 나서는 성격이 아니에요. 기부같이 제가 선택해서 하고 싶은 일은 하는데 명예 있는 일에는 나서질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 회사에 대해서는 친숙하지만 저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홈페이지 봐도 없고. 회사 기념품 하나 제작하더라도 ‘서원콤프레샤’ 회사명만 넣지 내 이름은 없어요. 재단은 의무적으로 기부 내용을 공개해야 해서 서원재단 블로그를 운영하게 된 거예요.
협회관 건립에 어떤 마음으로 기부하셨나요?
협회를 몇 번 가본 적이 있는데 규모가 아주 협소했어요. 열악한 환경이더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산업용재업계에 협회관을 세운다고 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협회장님과 수석부회장님께서도 건립기금에 대한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업계에 도움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당연히 성의껏 하겠다”고 말했어요. 협회가 성장해서 회원사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어떤 협회관이 지어지길 바라시나요?
전국 회원사의 규모에 맞게끔 세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임원진분들이 경험이 많으실 거라 보고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 협회의 사례를 바탕으로 잘 지을 거라 생각합니다. 돈은 잘 벌기도 해야 하지만 잘 쓰고 관리하는 기술이 더 중요해요. 협회 회관 건립을 위한 기금이 잘 운영되어서 업계가 성장하고 상생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길 바랍니다. 협회관을 짓고 나서도 기업들이 십시일반 배분해서 분명 잘 운영될 거라고 믿습니다.
유통에서 순수 국산 제조까지… 32년 콤프레샤 한 우물
기술력 바탕은 ‘박사경영’, 전문가 믿고 맡겨라
평생 콤프레샤 한 분야에 정통하십니다. 이 길로 발을 내딛은 계기가 궁금합니다.
10대 때부터 일찍이 서울로 올라가 콤프레샤 일을 했어요. 처음에는 육촌 형님을 따라 콤프레샤 판매수리업체에 들어가서 점원으로 근무했습니다. 혼자 아무것도 모르고 가서 기계를 배워야 하잖아요. 이것도 기술이라고 몽키, 스패너 나르고 다니면서 선배들한테 어깨 넘어 관찰하며 열심히 배웠어요. 직원이었지만 가게 문 제일 먼저 열고, 지하철 막차 탈 정도로 했으니까요. 옆집 사장님이 “저 놈은 우리집 서너 명 할 일을 혼자 다 한다”고 칭찬도 많이 들었고. 그렇게 성실하게 해온 게 사업을 하게 된 계기도 됐어요.
그렇게 일해오시다 직접 사업을 한 건 언제였나요?
85년도 9월 1일, 그러니까 스물다섯 살에 청계천에서 ‘서원콤프상사’로 판매업을 시작했어요. 직원생활 하면서 한 달에 10만원씩 받았는데 그 중에 9만5천원을 저금해 모은 자금 200만원 가지고요. 직장생활 할 때처럼 사업도 정말 성실히 했어요. 저는 제 능력에서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거든요. 사업 처음부터 지금껏 단 한 번도 결제 날을 어기거나 가계수표 또는 어음을 발행한 적이 없었어요. 대출을 한 번도 받지 않고. 철저하게 운영했습니다.
판매에서 제조로 넘어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콤프레샤 판매를 하면서 수리 기술을 배웠고 직접 유통을 하게 됐습니다. 작게 소매로 시작했는데 그 다음에는 도·소매도 하고 수입도 하면서 규모가 커졌죠. 그렇게 수입을 하던 중에 문득 ‘우리가 왜 수입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지인들은 다 말렸어요. 중국에서 싼 제품이 물밀 듯이 들어오는데 경쟁해서 이겨낼 자신이 있겠냐는 거예요. 다들 안 된다 해도 전 누군가는 제조를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콤프레샤는 비전이 천년은 있다고 봐요. 콤프레샤가 뭐예요? 공기압축기예요. 공기를 압축해서 재활용하는 거예요. 버려도 또 재활용하고. 이건 주인이 없고 특허가 없잖아요. 공기는 활용하는 사람이 임자잖아요. 이게 비전이지 뭐예요. 중국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 김밥집이든 옷가게든 다 안 된다 해도 누군가는 성공하잖아요. 내가 콤프레샤를 더 잘 만들어내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2002년 용인에 서원콤프레샤를 세웠어요. 처음에는 기계, 부품, 설계도면도 볼 줄 몰랐어요. 협력사를 통해 ‘이 상품을 개발해야 되겠다’며 전문 업체를 찾아다니면서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어렵진 않던데요. 국내든 해외든 간에 콤프레샤 전문 업체라면 쫓아간 거죠. 경쟁력 있는 제품들은 거의 다 사와서 살펴봤죠. 지금은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모든 상품을 개발하고 유통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기술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콤프레샤는 특별한 기술이라기보다는 보편화된 기술입니다. 그럼에도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었던 이유로 저는 ‘박사경영’을 말해요. 각 분야 박사들의 도움을 받는 거예요. 콤프레샤 제조 박사는 상품개발을 함께하는 협력사들이잖아요. 영업 박사는 영업담당자고, 경리 박사는 경리담당자예요. 각 분야에 박사들이 있으니 저는 경영자의 입장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누가 이 일을 잘할까’만 생각합니다.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겨야지, 내가 이 일을 다 한다면 지금처럼 회사를 운영할 수 없었을 거예요.
사업 운영하며 힘들었던 때가 있었나요?
사업하면서 힘든 일 많이 겪죠. 가장 힘들었던 건 사업 3~4년차에 2억 넘게 부도 맞았을 때. 그리고 상표법, 특허법을 잘 몰라서 위반으로 신고 당했던 일이 있었어요. 일 처음 배워 장사 시작한 사람이 뭘 알았겠어요. 이태리서 수입하는 제품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상표를 먼저 등록해놓고 우리한테 시비를 걸었던 거예요. 그래도 실제 권리는 이태리 기업이 갖고 있고, 한국에선 수입한 우리가 그 브랜드를 사용할 수 있잖아요.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승소했죠. 진실은 이긴다고 생각해요. 그런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노하우가 생겨 여기까지 오게 되더라고요.
굶고 못살던 어릴 적 기억에서 시작된 이웃사랑
장학금, 양로원, 재단 운영까지
사업하며 기부도 많이 하시던데, 그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베이비붐 세대예요. 농촌의 다자녀 가구에서 태어나서 정말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유별나신 분이셨어요. 음주, 도박으로 가족들에게 무책임하셨죠.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자랐고, 전 배움도 짧았어요.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은 두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 모습을 따라 배우거나 혹은 노력해서 더 잘 사는 것. 저는 정말 노력해서 제가 가진 능력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감정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생겨난 거예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공부 많이 한 친구들보다 기술을 더 배워 성공하고, 돈이 없어서 배우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10대 때부터 인생 계획을 세웠죠.
어떤 계획을 세우셨나요? 반대는 없었나요?
첫째, 나부터 건강하고 잘 살아야 하고 둘째, 내 가족이 부족함 없도록 해야 하고 셋째, 부모형제한테 잘 해야 해요. 그리고 고향 친인척이나 어른들한테, 그 다음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까운 사람한테 먼저 신경 쓰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남들에게 기부를 해도 못된 자식 소리 듣지 않잖아요. 집안 재실을 지어 기부했고, 아버지 송덕비를 세웠어요. 전남 무안의 고향에는 경로당을 지어 기부했고 지금도 매달 일정금액을 경로당에 지원해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을에서 표창장과 감사패 1호를 받게 됐고요, 무안군 향교에서 부부 효자효부상도 받았습니다. 마을에서는 부부공적비와 집안에서는 부부효행비도 세워주시더라고요. 원래 살아있는 사람한테는 비를 세워주는 게 아닌데 어르신들의 부탁을 여러 번 고사하는 것도 실례라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세웠어요(웃음). 저 혼자만의 비가 아니라 아내와 함께 기부한 것이니 더 뿌듯하죠. 기부할 때마다 가족들을 설득해요. 그래서 아내가 동참해 박종옥, 남명숙 부부 이름으로 기부합니다.
이후 서원재단을 설립하신 건가요?
네. 제 나이 50이 되면 재단설립을 하는 게 꿈이었어요. 95년도에 성북구 정릉1동 동사무소와 협력해 소년소녀가장 2명에게 매달 20만원씩 지원해준 게 첫 기부였습니다. 그렇게 독거노인까지 매년 늘려나가다가 좀 더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이웃을 돕기 위해서 지난 2013년에 70억을 출연해 서원재단을 세웠습니다. 재단에서 연간 1억5천만원 정도 기부하고 있어요.
1억 이상 기부자들의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전국74호, 경기도3호, 용인1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기업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해준 지역사회에도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용인시 관내에 보육원이나 보육시설, 어려운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 있어요. 제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사업하고 싶어도 이 분들이 안 계신다면 제가 일을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처음엔 읍사무소에 기부를 하다가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생기면서 이곳을 통해 기부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보니 2011년에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됐고, 상도 받게 됐어요. 제가 기부를 할 수 있게끔 다리를 놓아주신 분들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사무처 직원들이에요.
어려운 시기에도 기부를 계속 하셨다면서요?
제가 기부를 한다고 해서 그렇게 부자는 아니에요. 그렇지만 내가 어려우면 살기 힘든 사람들은 더 어렵잖아요. IMF 때 회사에 5억 정도 손실이 났고 금융위기 때도 힘들었지만 내가 한 약속에 대해서는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매년 기부금액을 늘렸고 현재는 초·중·고 45명의 학생에게 매월 장학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또 어떻게 하면 더 뜻있는 일을 해볼까 생각하다가 2006년에는 종신보험 10억원을 일시납으로 가입해 제가 죽거든 서울대 발전기금으로 사용해 달라고 공증해 기부했습니다.
남을 도우면 어떤 기분이 드세요?
봉사를 하면 가슴 벅찬 것 있잖아요. ‘나로 인해서 도움을 받는 분들이 조금이라도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면 엄청 좋죠.
기부 받은 학생들을 만나보신 적은 있나요?
아니요. 예전에 기관에서 장학금 받은 학생을 데려오겠다고 연락이 왔는데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이름 모르는 사람한테 빚을 지는 마음으로 산다면 나중에 성공해서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잖아요. 나한테 갚으려 하지 말고 도움 필요한 사람들에게 갚으라고 전했어요.
지금까지 기부한 금액이 얼마나 되나요?
장식장에 백억 짜리 시계가 있어요. 아름다운 납세자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얻은 포상인데요. 납세 의무도 잘 지키고 사회에 좋은 일 한 사람에게 준 상이에요. 20년 넘게 기부해온 돈을 합하니 백억이 되더라고요. 그러니 저 시계는 백억이죠(웃음). 저는 앞으로 재산이 100이 있다면 그 중 50%를 기부하고 싶어요. 홍콩 유명배우 성룡이 4천억을 기부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내 자녀가 능력이 있으면 이 재산이 필요가 없고 능력이 없다면 이 재산을 지킬 수 없다”라고요. 자식에게도 다 물려주는 것보다는 아버지에게 기부를 배울 수 있어 더 낫다고도 생각해요.
가장 중요한 건 ‘사람’
직원도 공구계도 함께 멀리 가야
봉사만큼 직원 복지에도 신경 쓰시나요?
직원들 복지는 특별한 것은 없고 매년 학자금을 주고 있어요. 근로조건에 따라서 1년 이상 근무자는 0세부터 초등학생까지 1자녀당 50만원, 3년 이상 근무자는 중학생 1자녀당 100만원, 4년 이상 근무자는 고등학생 1자녀당 200만원, 10년 이상 근무자는 대학생 학비 전액을 지급해주고 있습니다. 직원이 업무 능력향상을 위해서 기술을 배운다고 하면 학원비를 지원하고, 작게는 직원 생일 때 10만원씩 식사비, 어버이날 직원들 부모님한테 5만원 상당의 선물을 보내고 크리스마스 때는 케이크를 선물해줍니다. 건강검진은 직원들 가족까지 다 해드려요. 가족 중에 한 명이 아파도 회사를 못 나올 수 있잖아요. 건강을 알아야 보직도 옮길 수 있죠. 또 직원들은 4대보험 외에 상해보험도 가입되어 있습니다. 일하면서 다친 건 산재로 처리가능한데 일상에서도 다칠 수 있잖아요. 그래도 직원들한테는 항상 잘 못해줘서 미안하고 함께해줘서 고맙고 그래요. 저는 직원들 월급 주는 날이 제일 좋더라고요. 한 달에 한 번 직원들 기쁘게 해주는 날이잖아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회사를 경영하면서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가장 우선은 사람, 그 다음이 제품의 질이에요. 제품도 사람이 쓰는 거니까. 마지막으로는 가격경쟁력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중요한 사람 중에서도 첫째는 직원, 둘째는 협력사, 셋째는 판매 대리점, 넷째는 소비자예요. 직원의 경우 ‘나 같으면 우리 회사에서 근무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고 복지를 제공하고요. 협력사 입장에서는 ‘나 같으면 그런 조건에 물건을 납품할 것인가’, 대리점은 ‘나 같으면 우리회사 물건을 갖다 팔 것인가’, 소비자는 ‘나 같으면 우리 제품을 쓸 것인가’를 생각하고 제품을 개발, 생산하고 있습니다.
공구업계에 대한 사랑도 남다를 것 같은데요. 업계에 새해 소망이 있다면?
공구업계 유통이 힘들지 않습니까. 쉽게 얘기해 동네에 슈퍼가 여러 곳 있는데 근처에 대형마트가 생기면 전멸해버리는 겁니다. 그렇지만 선진국을 보면 크고 작은 유통업체들이 공동 발전을 해나가고 있거든요. 우리나라도 공구업계가 상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큰 나무 하나가 우뚝 서면 그 그늘에 가려져 죽는 나무들이 있듯 소규모 업체들도 언젠가는 도태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피해를 최소화했으면 해요. 저도 마음먹고 콤프레샤 가격을 올리고 경쟁사들 공격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동종업계를 죽인다면 오히려 본인에게 손해예요. 중국 등 외국 업체들이 살아나거든요. 1, 2, 3등을 함께 안고 가면 이들이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앞으로 협회관이 설립되면 유통질서 확립과 업계의 성장에도 많은 기여를 할 것이라 봅니다. 협회 임원분들도 회원사, 관계사들과 상생하며 운영한다면 참 멋지지 않을까요. 앞으로 협회관이 지어지면 함께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기대를 합니다.
글_장여진·사진_이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