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구상탐방
(사)한국산업용재협회 신찬기 회장
만남과 인연이 가장 소중합니다
(사)한국산업용재협회 신찬기 회장
근래 공구업계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점차 늘어가는 온라인 유통, 대기업 시장 침범, 공구인 세대교체,
규제로 인한 경영환경 악화 등 우리가 겪는 변화는 많다. 이런 변화의 시대에 (사)한국산업용재협회 신찬기 회장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40년 전 부터 시작된 공구인 인생
3천여 회원을 이끄는 한국산업용재협회 신찬기 회장은 현재 연매출 150억원, 16명의 직원을 보유한 종합 공구유통상사 이수툴의 대표이사기도 하다. 이수툴은 청계천 근처 을지로3가역 4번출구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 노가리와 맥주로 유명한 만선호프가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수툴에 들어서니 바쁜 와중에도 그가 따뜻한 미소로 맞이해 주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공구업계에 입문하신 과정이 궁금합니다.
“40년 전이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수 있었지만 장남이었던 저는 공부보다 운동에 흥미가 많았거든요. 동생들이 오히려 저보다 공부에 더 흥미를 보였어요. 동생들은 의사, 교사가 되더군요. 경남 합천에 위치한 저의 본가는 크게 가난하지 않았지만 3형제가 모두 대학에 가거나 사업자금을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옛날 모든 시골 살림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죠. 3남 2녀 중에 장남이라서 집안에 대한 책임감도 느꼈고요. 숙식이 해결되는 일자리가 필요했는데 작은 아버지가 청계천에서 큰 도매점을 운영 하시고 계셨습니다. 서울에서 장사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죠. 1980년에는 청계천이 한국의 공구유통 중심이었어요. 사실 다른 것이 없으니 해보자 싶어 작은 아버지 밑에서 5년 정도 일하면서 장사를 배웠어요. 그런데 5년이 지나니 작은 아버지 회사가 여러 사정으로 부도가 났어요. 당황스러웠지만 마침 군대를 가야해서 군대를 갔죠. 군을 전역해 다시 청계천에 오니 내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청계천에서 자전거 한 대로 장사 시작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은 인복이 많이 사람이라고 말 했다. 자신이 곤란에 처해질 때마다 주위에서 참 많이 도와준다고. 군 전역 후 자본금이 한 푼도 없었을 때도 청계천의 선배 상인이 자전거 한대를 주며 직접 사업 해보라는 응원을 받아 장사를 시작했다.
>> 자본금 없이 어떻게 사업을 시작하셨습니까?
“88년 당시에는 경기가 좋아서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정도 있었고 의리도 있었던 시대였어요. 남대문 도깨비 시장에는 청계천에는 없는 이색적인 물건들이 있었어요. 저는 남대문과 청계천을 자전거로 오고가면서 여러 심부름을 해주며 돈을 벌었지요. 가게의 직원은 아니지만 거래처의 필요한 물건을 대신 알아봐주고 또 대신 영업해서 흥정하면서 돈을 벌었죠. 청계천에 노점 상인들이 많았는데 아침에 물건을 주고 저녁에 수금을 하곤 했어요. 가게 얻을 돈이 없어서 자전거 한대로 시작했지만 과거 거래처들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이 자산이 되어 주더군요. 나름 일도 재미가 있었고 또 열심히 하니 돈 쓸 시간이 없어서 돈이 모였어요. 그렇게 일해 청계천에 작은 가게 마련 할 종자돈을 구합니다.”
‘이수만물’로 시작해 ‘이수툴’로 성장
신찬기 회장은 만능 스포츠맨으로 유명하다. 그는 축구를 좋아해 이수초등학교 조기축기회를 오래 동안 했다. 그래서 어렵게 마련한 가게 이름에도 ‘이수’를 붙인다. 종종 이수그룹과 관련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고.
>> 작은 가게를 큰 사업체로 성장시킨 비결이 궁금합니다.
“사람의 인생은 만남이 참 중요합니다. 저는 배우자를 잘 만났지요. 우리 가게 첫 직원은 사실 저의 아내입니다. 고향의 집안 주선으로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로 만나 결혼했어요. 집사람은 저와 같은 고향 경남 합천 사람입니다. 저만 믿고 서울로 올라와 신혼 때에 아무 말 없이 가게로 나와 일을 도와주었지요. 영업과 배송으로 바쁜 저를 대신해 손님의 전화를 다 받아주고 직원 역할을 해줬습니다. 그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아내가 출산과 양육에 집중하면서 대신 만나게 된 직원들도 좋았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니 좋은 거래처를 만났고 그래서 성장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좋은 만남 가지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열심히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찾아와요. 비결은 없습니다. 오히려 만남을 잘 이어가고 유지하는 인연을 만드는 것이 어렵고 중요합니다. 좋은 만남을 계속 유지하려면 신뢰와 의리, 사랑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한국산업용재협회 일도 그렇잖아요. 선배들과 후배 서로 중간 역할을 잘 해야 하고 지역과 지역의 연결도 잘 해야 하고요. 저는 사업을 하면서 한국산업용재협회 일을 오래 동안 참여 했습니다. 그래서 힘들 때 도움도 받고 또 거래처의 힘든 사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장한 것이죠.”
한국산업용재협회 인연과 협회장 되기까지
청계천에서 평생을 보낸 공구인답게 그는 한국산업용재협회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했다. 험난한 세상에서 혼자만의 생각과 힘으로 사업을 지속하는 것은 힘들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크고 작은 고난이 찾아올 때마다 한국산업용재협회를 통해 모범 사례를 찾아 문제를 해결해왔다.
>> 한국산업용재협회와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1997년이었을 겁니다. 현 동신툴피아 회장이신 김동연 고문님께서 한국산업용재협회장으로 재직하실 때였어요. 그때 그분이 협회 일을 어떻게든 해달라고 권하셨어요. 청계천에 가게를 넓히고 매출을 올리는데 여러 방면으로 열심히 일 할 때였죠. 협회 이사로 처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협회 활동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 어떻게 협회장에 취임하시게 되셨나요?
“서울지회 총무를 3년간 하고 그 다음에는 서울 지회장을 3년씩 2번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협회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또 그렇게 쌓은 경험을 협회를 위해 미약하나마 제 힘을 보태 주변에 보답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업용재협회장 선거 치루는 일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선거를 통해 당선된 것이 참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후보로 마지막까지 경쟁하신 분도 업계에서 참 훌륭하신 분이라 박빙의 승부였는데 제가 당선되어 남은 임기 더더욱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협회장 활동 1년 스스로 돌이켜 보니
>> 협회장이 되신 후 어떤 일을 먼저 하셨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부결속 다지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우리 한국산업용재협회는 1975년 작은 모임에서 시작된 비영리 단체입니다. 그런데 점차 회원수가 늘어나고 덩치가 커지면서 회원들 사이 화합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모든 회원들이 한 곳을 바라보면서 함께 발전하도록 만드는 노력이 계속해서 필요합니다. 그리고 청계천 개발문제와 유진기업을 비롯한 대기업의 시장침탈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요청하는 것에 주력했습니다.”
신찬기 협회장은 당선 후 지난 1년 동안 청와대 자영업 비서관, 서울시장,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중소기업중앙회장 등 여러 정부기관 및 단체의 장들을 여러 차례 만났다. 모두 공구업계의 발전과 보호를 위한 노력이었다.
>> 협회장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점은 무엇입니까
“임기 중에 제가 해야 할 중요한 중점 사업이 바로 회원 수 증가입니다. 그래서 지난 1년 동안 협회의 지회장님, 임원님들과 함께 화성과 평택, 안산, 시화지역 등에 자리한 비회원 업체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협회 가입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공구인으로 함께 노력하자는 인식이 널리 퍼져야 합니다. 각 지역 현장에서 회원가입 신청서와 회비를 받는 활동을 벌였고 앞으로 계속 벌일 예정입니다. 이제 공구인이라면 누구나 협회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협회 사무국으로 언제든지 연락주시면 친절하게 가입절차를 안내해 드릴 것입니다.”
지난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한국산업용재협회 주관으로 공구전시회 툴쇼가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되었다. ‘코로나19’라는 악재 속에서도 회원사 및 참가업체의 협조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신찬기 협회장은 앞으로도 툴쇼를 통해 제조업체와 메이커 그리고 유통업체가 서로 협력하고 상생하는 만남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라 말했다.
모든 공구인 위한 업계 미래 생각해
>> 대기업의 공구 업계 진출 막을 수 있을까요?
“지난해부터 중소기업중앙회 이업종 분과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이를 협회 내부조직인 유통발전위원회와 상생발전위원회 업무와 연결시켜 우리 공구인들의 시장을 대기업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큰 대기업이 큰 물에서 놀지 않고 작은 유통시장까지 침범해 소규모 공구상의 생계를 위협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저는 포기하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저지할 것입니다.”
>> 공구업계를 위한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한국산업용재협회가 더욱 커져야 합니다. 지금의 3천명의 규모보다 훨씬 증가한 회원 수를 자랑해야 더욱 큰 힘을 가져 우리 업계와 일터를 지킬 수 있습니다. 동시에 서로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 협력하고 협동해야 합니다. 회원 수 증가와 더불어 다 잘 살 수 있는 내부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나갈 것입니다. 이제는 개인의 욕심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위해 마음을 비우고 다 같이 하나로 뭉쳐야 할 시점입니다. 그래야 정부나 관계기관에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 업계의 미래를 위한 길입니다.”
신찬기 협회장은 이수툴 사업 초기부터 언제나 아침 7시 이전에 문을 열었다. 고객이 원하는 물건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한국산업용재협회 회원들은 그런 그의 신용과 성실함을 믿고 있다. 많은 변화의 파도 속에서 그가 보여준 성실함과 정직, 또 그가 말하는 신의와 단합이 우리 고민의 해결책으로 여겨진다.
글 _ 한상훈 / 사진 _ 김성호